55page

定)口찜 1O.5cm, 底짧 1O.35cm이고, 백자사발은 高 7.45cm, (推定)口쩔 9.Ocm, 底찜 2.85cm이다. VII. 고찰(圖版122'" 148) 지금까지 밀양고법리에 위치한 송은선생의 벽화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선생의 생 애와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이번 봉분 내부에서 출토된 훌농石과 밀성박씨 문중에 전해 내려온 松隱先生文集 그리고 E縣첩을 통해서 그 역사성과 신빙성이 어느 정도 검증되 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벽화묘는 장차 선생의 인물연구는 물론 조선초기의 문화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 분명하다 다만 선생이 돌아기-선 시기가 문 집과 족보 둥의 자료를 통해서 지금까지 문중에서는 1398년 11월로 알고 있었으나 묘 에서 발견된 지석에서 “永樂康子二月 甲寅舞” 이라 하여 세종 2년(1420) 2월에 장사를 지낸 것이 확인되어 돌아가신 해와 장사지낸 해 사이에 22년의 격차가 생겨 의문점으 로 남는다 현재까지 확인된 선생에 대한 각종 자료를 종합하면 돌아가신 해도 분명한 사실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22년 동안 가매장하였다가 다시 지금의 묘 에 안장한 것으로 추정 해석된다. 그러나 석실내부에 안장된 상태를 분석하면 가매장 의 흔적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즉 흐트러지지 않고 뼈展裵 모습 그대로 싼존한 유골과 목관, 명전 등의 배치상태는 가매장하지 않고 처음부터 이곳에 안치했다고 해도 무리 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것이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중의 하 나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말년의 관직과 교우관계 등 지석에서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도 이번 자료를 참고삼아 계속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 우리들이 주목했던 것은 석실내부에 그려진 벽화이다 그것은 묘에서 발견된 誌£에 의해 피장자가 松隱先生이 분명해졌고, 장사지낸 해가 朝蘇初期 (A.D.1420)라는 절대연대가 확인되어 조선시대 초기의 장례문화는 물론 당시 회화사,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띠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