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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규는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당시 대동단은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동지로 포섭하는 한편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폈다. 1919년 10월 대동단은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하기로 계획하고, 동년 10월 10일 동단의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1차로 망명시킨 뒤 의친왕(義親王)의 상해망명을 추진했다. 이러한 대동단의 계획을 위해 강태동(姜泰東)과 함께 상해에서 귀국한 그는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하는 한편 상해의 임시정부로부터 송달된 〈적의 관리(官吏)인 동포에게〉·〈남녀 학생에게〉등의 각종 선전물 3천 5백매를 배포하면서 적극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정남용(鄭南用)과 함께 의친왕을 상해까지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던 그는 준비가 완료됨에 따라 동년 11월 9일 서울을 출발했으나, 도중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이들은 일행은 동년 11월 11일 만주 안동(安東)역에서 피검되었는데 이때 그는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20년 1월 재입국했다가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이로써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다시 상해로 건너가 무력투쟁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무지 제조 및 무장훈련에 힘을 쏟았다.그후 만주로 넘어간 그는 1929년 7월 김좌진(金佐鎭) 등이 주도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참여하면서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계열의 운동을 전개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