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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창하였다! 공은 1907년 고종 44년 정미 8월 1일 고흥군 과역면 분천리에서 팔영산 정기를 받아 부친 영○공과 모친 밀양박씨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천자가 총명강의하였고 학문과 충효심이 뛰어났다. 과역보통학교 2회 졸업한 후 부안임공 영화의 따님 명례 규수와 혼인하셨다! 광주사범학교 3학년 재학 중 공은 일제의 민족 탄압과 식민지 노예교육에 의분을 금치 못하여 광주고보 광주농업 광주사범 광여고 수피아여고보생들과 모의 항일 비밀결사인 성진회를 조직하였고 뒤이어 항일민족문화와 항일사회교육연구를 목적으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중앙위원회까지 결성하는데 주력하셨다! 공은 젊은 목숨바쳐 조국광복을 이루겠다는 일념에서 거사의 기회를 계책하던 중 1929년 11월 3일을 기하여 하늘을 찌른 광주구국학생들의 의기가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폭발하니 공은 그 지도자로서 앞장서서 맨주먹으로 삼엄한 일제의 총칼앞에 항쟁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에 호응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수만학생들의 천지를 진동한 함성은 간악한 일제의 가슴을 서늘하게 찔렸으며 세계만방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립정신을 찬양케 하였던 것이다! 공은 이 사건의 주모자로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악형에 굴하지 않으시고 2년 9개월의 옥고로 명재 경각이 된 채 대구감옥에서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가족과 동지들의 피어린 구료의 보람도 없이 1933년 2월 16일 청춘을 조국광복을 위해 한 목숨 바치시니 27세였다! 공이 가신지 13년 만에 조국광복이 되고 1985년 8월 정부에서 공의 충혼을 기려 묘비 건립 보훈금과 고흥군 당국의 묘역 조성 지원으로 거적곡에 모셨던 유택을 분천마을 고개걸좌로 이장하고 사적비를 세웠으며! 이제 번영회의 협찬과 고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