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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025년 10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우열이 이른바 ‘허무당(虛無黨) 선언서 배포 사건’으로 체포되자 일제 경찰은 그를 ‘갑종 요시찰인’으로 규정하고 감시하기 시작하였 다. 이후 경신학교·동덕여학교·연희전문학 교·배재학교·중앙학교 등에서 재직하며 학생 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서울 신촌에 있는 연희전문학교를 갈 때 는 단 5전의 전차 삯을 일본인에게 주기 싫어 서 걸어 다닌 일화를 남겼다. 특히 경신학교 교원 시절인 1933년과 1934년 사이에는 제 자들에게 민족의 얼을 지녀야 나라와 국어도 지킬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자신은 독 립투쟁의 전선에 매진하다가 감옥에서 죽게 되더라도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 라”고 하는 등 학생들에게 민족 독립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국어와 역사 연구 병행, 조선어 강의 힘써 1930년 10월 3일부터 12월 13일까지 『동 아일보』에 「성웅 이순신」을 43회 연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연재물은 1931 년 9월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성웅 이순신』 으로 출판되어 초판이 모두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에 두 번째 판을 발매하였 으나, 다 팔리기도 전에 일제의 관헌이 “조선 사람에게 읽힐 것이 못된다”하여 발매금지 처분을 하였다. 광복 이후 1946년 『성웅 이 순신』은 통문관에서 재발행되었다. 한편 중국 베이징 시절 흥사단원으로 활동 한 뒤 1923년 국내로 돌아와서는 흥사단의 노선을 이은 수양동맹회·수양동우회·동우회 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는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1937년 6월 7 일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일제 당국은 “예전부터 민족주의 사상을 신봉하 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살아왔던 자”로 결론지었다. 1938년 7월 29일 보석으로 풀 려날 때까지 1년이 넘도록 옥고를 치렀고, 이 후에도 일제에 협조하지 않았다. 한편, 한글운동의 핵심인물로서 조선어연 구회와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어 학회의 한글운동은 민족어의 규범을 수립하 고자 하였다. 민족어 규범 수립이란 한글 맞 춤법의 통일, 표준어의 사정(査定), 외래어 표 기법 제정 등을 말한다. 먼저 한글 맞춤법 통 일안의 제정에 참여하였다. 1930년부터 조 선어학회가 추진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 수정위원, 정리위원으로 3년간 활동하 였다. 한글맞춤법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하 였다. 그러면서 우리글에 한자를 넣어 사용 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순국문 으로 문자 생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한국어 표준어 사정 작업에도 참여하였 다. 1935년 1월 조선어학회가 한국어의 표준 어를 사정할 때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활 동하였다. 조선어 사전 편찬 핵심적 역할 수행 16만 어휘에 달하는 우리말의 뜻풀이를 제 대로 한 민족어대사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