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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8일은 고현장날이었다. 이날 우리의 선인들은 "동포여!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라는 기치를 높이 세우고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외쳐 불렀다. 이로써 여섯분이 옥고를 치루었고 다섯분이 모진 고문을 겪었다. 이 격렬한 독립의거 시위는 4일 후의 삼진의거의 전주곡이었다. 그날 4월 3일 음 삼월 삼짇날 아침부터 군중은 양촌리 앞 냇가로 모여들었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산과 들에 메아리쳤다. 군중은 대열을 이루어 일본 헌병대 소재지인 진동으로 향하였다. 30리 거리의 연도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속속 대열에 참가하니 사동교에 이르를 무렵에는 8천의 대중을 이루었다. 온 누리가 태극기의 바다요 만세의 함성이었다. 그러나 아아 슬프다! 미리 포진하고 대기하던 30여명의 일본 헌병과 그 보조원들은 쇠붙이 하나도 지니지 않은 맨주먹의 우리 겨레에게 발포하니 선두를 지키던 여덟분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스물 두 분이 부상을 입어 사동교의 현장을 피의 아수라장으로 화하였다. 또한 수백명이 붙잡혀 갖은 고초를 당한 끝에 일곱분이 옥고를 치루었다. 이 의거는 수원.선천.수안의 그것과 더불어 4대 의거로 손꼽힌다. 아아 거룩할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정기의 정화 위에 오늘날 조국은 선진국가로의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경상남도와 의창군이 이 뜻을 길이 기리고자 여기 돌을 다듬어 이 비를 세우나니 이 비를 대하는 이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라. 그 당시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가슴에 손을 얹어보라. 그 날의 그 분들의 맥박이 그대의 가슴 속에서 고동치지 않는가!
1985년 12월 일 의창군수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