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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보에서 이회영·이상룡 등과 경학사를 만들어 민생안정과 교육진흥에 주력하였다. 또한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이 되어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1912년 신흥강습소를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하고, 신흥무관학교로 확대·발전시켰다.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한국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3개월 여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후 이상설·이동휘 등과 권업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는 동시에 『대동신문』·『해조신문』을 발행하였다.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장과 함께 국무총리로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4년 다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으로 취임하고, 이후 국무령·법무총장을 역임하다가 1927년 주석이 되어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30년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했고, 1930년과 1935년 임시정부 주석이 되어 1940년 사망 전까지 임시정부와 함께 하였다. 1940년 3월 중국 사천성에서 지병인 천식이 악화,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