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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세인 1918년 12월에 고종이 승하하자 즉시 다던 여재에서 망곡례를 행하였고, 74세안 1919년 삼일독립운동 뒤, 문인들이 한국유림의 총의로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자는 의견에 찬동하고 전국의 유림 대표를 맡아 파리장서를 짓고 유학자 137명의 연서를 받았다. 면우가 마련한 파리장서는 거창 다전 여재에서 제자인 김창숙에게 전달하여 중국 상하이로 가져가 번역, 인쇄하고 파리로 향하던 김규식에게 맡겼다. 장서를 파리강화 회의 의장및 각국 대표들과 각국 공관, 세계 각 매스컴, 한국의 각 서원에도 우편으로 발송하자, 이에 놀란 조선총독부는 "유림단사건"이라고 이름하여 관계자들을 체포 구금하면서 면우에게는 징역 2년 형을 선고하였다.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곧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