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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윤재 선생 53 1911년부터 1913년까지는 기독교 계통 학 교인 마산 창신학교에 재직하면서 한글과 역 사 과목을 가르쳤다. 1915년에서 1917년까지 3년간 일본 도쿄 (東京)에 머물면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과를 다니며 학업에 정진하였다. 1918년 부터 1919년까지 2년간 평북 영변(寧邊)에 있는 숭덕학교에서 한국어와 역사를 가르쳤 다.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19년 3월 2 일 독립선언서 40여 장을 등사·배포한 사실 때문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신의 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 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평양감옥에서 옥 고를 치르다가 1920년 7월경 풀려났다. 신채호 영향 받고 베이징대학에서 역사학 공부 이후 일본 유학을 도모하였으나 전과 때 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중국 유학을 결정 하였다. 1921년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뒤, 독립운동가인 신채호(申采浩)를 찾아갔다. 1921년에서 1923년까지 베이징대학 사학과 에 다녔고, 신채호와 만나면서 민족주의 사 학을 수용하는 등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 하여 신채호가 강조한 민족의 영웅, 상고사 에 대한 사관, 그리고 일제에 대한 비판 등을 계승하였다. 1922년 흥사단에 입단청원서와 이력서를 내고 문답식에 합격하여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문답식은 흥사단 원동임시위원 부 위원장인 안창호(安昌浩)가 맡았다. 이후 안창호의 노선에 입각하여 흥사단·수양동우 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여름 귀국하였고, 1924년 9월부터 1년간 오산학교 교원으로 한국어 과목을 담 당하였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한글의 역사를 교육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강제로 해직되었 다. 이후 서울로 와서 1925년 4월부터 1927 년 3월까지 낙원동에 있던 협성학교 교원으 로 근무하였다. 이때 독립운동을 하던 청년 윤우열(尹又烈)을 도와주었으나, 1926년 윤 조선어학회의 ‘조선어 표준어 사정회(査定會) 제2회  독회(讀會)’ 기념 사진(1935.8.8, 북한산 입구 봉황각) 수양동우회 기관지 『동광(東光)』에 수록된 이윤재의 글 (이상 독립기념관 제공)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