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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한용운 선사 53 민립대학건립운동 등 지속적으로 민족운동 을 전개하다 1921년 12월 21일 서대문감옥에서 석방된 뒤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지속 하였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 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에는 조선민립 대학기성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 다. 그리하여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 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나아가 1924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 총재 로 추대되었다. 그는 정교(政敎)의 분립을 강 력하게 주장하면서 한국 불교를 옭아매는 사 찰령(寺刹令)의 폐지를 강조하였다. 또한 불교 인들의 자주적 불교활동을 각성케 하고, 대중 불교 노선으로 불교 발전에 매진하자는 이론 을 정립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그의 청년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면이 있 어, 『유심』·『조선일보』·『대중공론』 등의 언론 매체를 통해 “지금 조선에 학문과 지식을 겸 비하고 심리적 수양이 이뤄져 역경을 헤쳐 나 갈 수 있는 지혜로운 젊은이가 절실히 요구되 고 있다고 전제하고, 전로(前路)에 목표를 설 정하여 매진할 수 있는 젊은이를 길러내야 한 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의 조선청년을 ‘시 대적 행운아’라고 지칭했다. 이는 “조선 청년 들이 피와 땀을 흘려 현실을 개척해야 할 사 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코 회피하거나 좌절 해서는 안될 것”임을 일깨워주는 역설적인 표 현이었다. 특히 1927년 2월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 으로 신간회(新幹會)의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 인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신간회가 창립되자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되어 민족운동의 최일선 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5월에는 김법린·최범술(崔凡述)·김 「지옥에서 극락을 구하라」(『동아일보』 1921년 12월 24일자에 실 린 한용운의 옥중 소감을 적은 글, 왼쪽은 12월 22일 경성감옥[서 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한 한용운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29년 12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무소 재수감시  한 용운의 모습(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