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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구 (당시46세) 경기 파주 금촌 평화공원묘지에 안장 1927년 9월 29일 출생 단국대학교 졸업 1960년 한국일보 대구지사, 대구일보에서 기자로 근무 1961년 민족일보 기자 1964년 대일굴욕외교반대운동 전국공동투쟁위원회 중앙본부 간부로 활동 1969년 삼선개헌 반대운동에 가담 1970년 남북공예사 사장을 하면서 장준하의 유신반대 운동 1974년 긴급조치 4호를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5년 유기징역형 1975년 10월 15일 서울 구치소에서 옥사 |10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박정희정권 사회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27년에 태어나서 단국대학교를 졸업하였고, ’60년까지 한국일보 대구 지사, 대구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하다가 이후 상경하여 혁신계열 언론사인 민족 일보 기자를 하였다. ’61년 5.16쿠데타 이후에는 시국강연을 한 이유로 혁명검찰 부에 연행되어서 3�4개월 가량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다음에 요시찰 대상이 되 었다. 동지는 석방된 이후에 서울로 와 대구매일신문 서울지사에서 1�2년 정도 근무를 하였고 ’64년에는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대일굴욕외교반대운동 전국공동 투쟁위원회 중앙본부 간부를 역임하였으며, ’69년에는 삼선개헌반대운동을 하였 다. 삼선개헌반대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이자 당시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장준하동지와 교류를 하게 되었다. ’70년 무렵부터 가업을 이어받아서 나전칠기 공장(남북공예사)을 경영하면서 자강학회 운영위원으로 계속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던 중‘인민혁명당재건위’사건으로 수배되어 도피중인 동지를 자신의 공장에 숨겨준 혐의로 ’74년 6월 15일 검거되어,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 운명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동지는 세칭 인혁당 사건을 조사했던 중앙정 보부에 의해 수사를 받았다. 중앙정보부는 수사 중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자행하여 피의자들이‘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직을 결성한 것으로 사 건을 조작했다. 피의자 진술조서는 물론 공판조서까지 허위로 작성되었다. 동지 는 평소 혈압이 조금 높은 정도였으나 수감된 후 중증 고혈압 환자가 되어서 ’75 년경 병사에 입원을 반복하다가 10월 15일 새벽 뇌출혈로 쓰러져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발병 7시간이나 지나서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운명하였다. 끝내살리라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