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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가평의 일과 인맥 4. 강재 신숙 선생 공적 개요(剛齊 申關, 1885. 12. 29 ~ 1967. 11. 22) 한국의 민족적 독립운동은 모름지기 통일된 혁명적 전선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되며 , 또 유력 한 혁명적 중추로 유일한 민족적 혁명당의 형체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국민위원회는 ‘한국독립당’이라는 명명 하에 당규 및 당의 현시 착수할 사업방침을 정했다 (중략) 한국의 독립 운동은 평화적 운동 및 타협적 수단 혹은 침략적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외교로는 성공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 - 선생이 중심이 된 한국국민위원회의 한국독립당 조직안 중에서 (1924.6.7) -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신숙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85년 12월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난 선생은 머리가 영민하여 동네에서 신동으로 일컬 어졌다. 일제의 침략으로 주권이 상실되어 가던 상황을 목격하고 을미의병 에 참여한 부친 과 뒤 에 헤이그 특사였던 이준 열사의 가르침을 받아 민족의식을 형성하였다. 1903년 보국안민 · 광제창생을 내세우는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개 명하고 문명개화운동을 추진하자 문창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 년 친일 주구노릇을 하던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처단을 시도하였다. 1910년대 천도교의 종합강습소 강사, 대구 대교구장 중앙총부 서계원 등으로 활동하였 다. 1919년 3 .1운동 직전 보성사에서 국립선언서 교정과 인쇄작업을 도왔다. 1919년 3.1 운동 직후에는 대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국내외의 임시정부 수립활동에 관여하였다 가 일경에 피체되어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의 천도교인들을 결속하여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 였다 천도교인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도 하였으나, 임시 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여 북경으로 이동한 뒤 에는 1921년 4월 신채호, 박용만 등과 군 사통일회의를 조직, 의장이 되어 주도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창조파 맹장으로 활약하면서 부의장을 맡아 노령에 임시정부를 새롭게 수립할 것을 주장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25년 흑룡강성 길림으로 이주한 뒤 신창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8년에 는 신민부에 참여하고 민정위원이 되어 전권대표로 3부 통합운동을 앞장서 벌여 나갔다 1930년 지청천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9.18 만주사변 후에는 한국독립군 참모장으 로 활약하였다. 해방 직후 통일국가 수립에 헌신하였고, 천도교와 민주발전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병 으로 쓰러져 1967년 11월 22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 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11월 한 달 동안 전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