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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대구 달성공원에서 시회를 가장하고 구 한국 의병장령 각○ 애국지사 수백명을 회합하여 광복회를 조직하시고 선생이 총 사령관 직에 추대되었다. 본회의 명칭과 법규는 군사식으로 결성되어 전국 각도에 지부와 참부장까지 배치하며 독립자금을 모 집하여 반역분자의 처단및확을 수집하였다. 그 이듬해에 상해에 건너가 중국인의 안내로 무기를 다수 구입하고 귀로에 만주로 두 루 다녀 동지 요인과 회의하여 5안조 1단식 결사대인 의렬단을 조지하셨다. 귀국후 총포화약 위반죄로 검거되어 김진만 정운 일 최준영 소잔우 최병규 정순영 홍주일 제씨와 함께 십여개월만에 출감하셨다. 당시 특별 보도된 대국 권총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그 러나 선생은 본뜻을 불변하고 더욱 일치단결하여 군자금과 반역자처단을 계속 진행하는 동시에 동지 우재룡 권영만을 시켜 세금 일만 팔천 칠백원을 압수하여 군자금에 충당하고 일병 친일반역자들을 동지 채기중 김한종 유창순 장두환 제씨를 시켜 처단하고 그 나머지로 군속처단하려듣 도중 불행히 단기4250년 12월 20일에 광복회의 비밀이 탄로되매 왜경 수백명에게 포위 검거 되어 공주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동지 천 여명이 관련 체포되었으나 선생은 총책임을 단독 부담하시고 서울과 대구로 이감되어 만 4년간 갖은 악형을 받으시다가 단기4254년 8월 11일(음 7월 8일)에 향년 38세를 일기로 동지 과 함께 애석하게도 고수형을 당하셨다. 임종시에 한시 한절을 남기시셨다. 難復生此世上幸得爲男子身 無一事成功去 山嘲綠水嚬 오희라 흉적에 비록 의사의 생명은 았았으나 그 정신은 뺒지 못하였다. 이 정신은 민족정기로서 합병전 의병운동하던 선렬의 뜻을 받아 고씨가 전하여 가먀 독립운동으로되고 상해 임시정부가 되고 독립의군부가 되고 드디어 을유광복이 되었으니 아직도 선생의 정신이 가승 깊이 메아리치고 있음은 양단된 국토통일의 결성을 거둘것이로다. 선생의 거룩한 사적을 한조각 돌에다 일임여 새길수 없음은 실로 유감인바이다. 단기4293년 8월 15일 박상진의사추모사업 울산군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