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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남은 1896년 함경남도(咸鏡南道) 함흥(咸興)에서 출생했다. 그는 부모님을 따라 하와이로 이민을 온 것 같다. 한인기숙학교 졸업식 당시 황진남은 연단에 올라 ‘대한국의 청년’이라는 주제로, “국가적·신앙적·윤리적으로 완전한 교육을 받을 때에, 우리가 능히 우리 대한국의 바라고 바라는 독립을 지금부터 10년 안에 건설할 줄 믿는다.”라는 연설을 하여 박수를 받았다. 한인기숙학교를 졸업한 황진남은 1910년 9월 호놀룰루 마노아벨리에 있는 중앙태평양학교 8학년에 입학하였다. 1919년 캘리포니아대학을 다녔다. 3월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소식이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에 전해졌다.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공부하던 황진남은 “애국하는 충심이 극도에 달하여, 무슨 방면으로든지 나랏일에 한 부분을 돕고자 하여 자원 퇴학하고, 현금 캘리포니아주 각처에 다니며 각 교회와 사회를 심방하며 유세”를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1919년 3월 15일에 재류동포전체대표회를 열고 독립운동 방침을 결정하였다. 전체대표회결의안 제6항에 의하여,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를 재미한인의 대표로 선정하고, 황진남과 정인과(鄭仁果)를 통신원으로 임명하여 중국 상하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창호는 4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황진남과 중국에 갔다. 이들은 5월 25일에 도착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고, 13일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여 의원들을 지방회에서 선거하도록 하였다. 지방회는 국내 8도, 노령·중국령·미국령 등 11개 지방으로 구분하였는데, 황진남과 정인과가 미국령 대의사로 선출되었다. 황진남은 안창호의 비서로서 그를 도왔으며, 영문에 능숙하여 중국 현지 영자신문 등에 일제의 한국통치 실상을 알리는 영문선전의 문서를 작성하였다. 1920년 2월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 제5과(교통)의 상임위원이 되었고, 그해 3월 16일자 『노스차이나 데일리 뉴스』에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그의 기사가 실렸다. 1920년 6월 미국의원 시찰단이 아시아 각국을 순행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안창호는 미국의원단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로 하였다. 안창호는 미국의원단을 직접 영접하기 위해 영어에 능숙한 황진남을 대동하고 필리핀으로 가기로 하였다. 안창호와 황진남은 마닐라까지 가서 미국 의원단을 맞으려고 하였으나, 필리핀에 갈 수 있는 여권을 얻지 못하여 홍콩으로 갔다. 그런데 미국의원단이 탄 배가 풍랑으로 인하여 홍콩을 경유하지 않고 상하이로 직항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8월 8일 황진남은 상하이의 대동여사에서 개최된 유학생 주최 미국의원단 환영회에서 참석하였다. 황진남은 여운형·장덕준과 함께 8월 16일 미국 하원의원 쵸스타를 방문하고 일본의 한국지배 실상을 설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등 제반 문서를 제공하였다. 17일 미국 하원의원 스몰을 방문했다. 19일에는 캠프 하원의원과 하디 하원의원을 방문하고, 20일에는 해리스 상원의원과 오스븐·굿드올·하스만·모리스 하원의원과 교섭을 하였다. 이같은 외교활동으로 황진남은 9월 29일 임시정부 외무부 참사(參事)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황진남은 1921년 2월 17일 임병직(林炳稷)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하여 프랑스배 아토란츠크호를 타고 유럽으로 향하였다. 황진남은 3월 28일 프랑스의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하였고, 30일 파리로 가서 파리위원부로 갔다. 그는 원래 파리에서 영국 런던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5월 18일 독일로 가게 되었다. 독일로 가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여 광산학을 전공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본이 무고한 한국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독일인으로 동양미술을 전공한 부르크하르트 박사가 『보시쉐 자이퉁(Vossiche Zeitung)』 1923년 10월 9일자에, 「한인에 대한 대량학살」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직접 목도한 바를 게재하였던 것이다. 이를 본 독일 유학생 황진남과 고일청은 10월 18일 부르크하르트 박사를 찾아가 그에게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학살에 대해서 자세히 물었다. 독일에서 학업을 하던 황진남은 다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소르본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파리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는 ‘시몬흥’이라는 프랑스인과 결혼을 하였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1938년 9월 귀국하여 고향 함흥에서 프랑스인 부인과 함께 살았다. 황진남은 함흥의학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8.15해방 이후 월남하여 여운형과 함께 정치활동을 했다. 1946년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육군성 소속으로 일본으로 가서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이라는 한국어 방송을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일본 오키나와에서 방송 활동에 종사했다. 1970년 5월 13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