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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하시었다. 대주청년회 대구농민회 정오회 등 항일단체를 조직지도 하면서 기미독립운동을 서울과 대구에서 주동하시었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셨는데 이떄 박열 장진홍 이상화 등 많은 지식청년들이 선생의 독립이념과 자유연합사상에 감화되어 구국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대구고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한 혁진단을 조직하여 항일학생운동을 지도하셨고, 대구노동공제회 대구노동친목회 용진단 철성단을 조직지도하는 한편 2천여 회원의 상호부조와 복리증진을 도모하시면서 왜적군수품의 대륙수송을 저지하고 자금인상투쟁을 성취시킨 철도운수의 총파업을 지휘하여 경부선을 7일간 마비시켰으며, 대구노동학원을 사재로 설립하여 회원자녀들을 교육하시었다. 1925년 전항일단체를 통활하는 진우연맹을 조직영도하시면서 전국독립운동자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셨고 적도 동경에 있던 박열의 흑우회를 재건케 하시는 한편 파괴단을 조직하여 적의 요인암살과 전관서의 폭파를 계획했다가 거사직전에 탐지되어 서동성 방한상 서학이 하종진 김동석 등 120여명의 청년동지들과 함께 피검되셨는데 선생은 방약무인한 법정투쟁을 2년동안이나 주도하시었고 단신 파옥 시위등 옥중투쟁을 7년간이나 지위하시었다. 출옥후 1934년 만주길림지방에서 자치농장을 세워 실향민 100여호를 수용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셨다. 그후 임시정부로 망명도중 피체되어 2년간 감금되셨고 거듭된 예비검속으로 10여년의 옥고를 겪으셨다. 광복후 동지들과 함꼐 조국통일에 전념하시면서 건국에 참여할 청년동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시었고 선생의 후광과 지원을 받은 최해청과 청년동지들이 독립정신을 창학이념으로 한 청구대학을 세웠으며 임시정부 국무위원 유림은 독립노농당을 창당하고 중앙감찰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1958년 6월 15일 향년 74세로 대구시중구 삼덕동에서 영면하시니 동지들은 이곳 선열묘지에 성대한 사회장으로 모시었고, 대한민국정부 건국포장으로 서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