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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2025년 3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만세운동을 이끈 손병희가 천도교 조직의 보 호와 유지를 맡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심 양면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2 월 10일경 금융관장 노헌용에게 명령하여 김 상규에게 3만 원을 지급하였다. 1월 5일부터 49일간 특별 기도를 실시하도록 하여 교인 들을 결집시켰다. 49일 기도를 마친 뒤에는 2월 25일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오영창을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 30여 명을 서울로 불 러 만세운동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조선독립신문』을 발간 하는 등 만세운동에 관여하였다는 이유로 붙 잡혔다. 집에 숨겨두었던 자금 70만원도 압 수되었다. 경무총감부에 송치되었고 ‘민족대 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이른바 출판법 및 보 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20년 10월 30 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받고 다음날 1 년 8개월 만에 풀려났다. 풀려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 밀리에 후원하였다. 상하이와 베이징[北京]의 천도교 전교실을 통해 자금을 제공하였다. 천도교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매개한 천도 교 지도자는 최동오와 신숙이었다. 1921년 9 월 태평양회의 개최와 관련하여 임시정부로 부터 모종의 활동을 지시받았다는 이유로 대 종사장 정광조, 현기관장 오상준, 경성대교 구장 장효근, 천도교청년회장 정도준과 함께 경찰에 소환되기도 하였다. 6 · 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1926년에는 천도교 구파의 최고 원로로서 구파 지도자 이종린·권동진, 천도교청년동맹 간부 박래홍·박래원 등이 추진하던 6·10만세 운동을 승인하였다. 1927년 1월에는 천도교 1920년 ‘48인 사건’ 재판 보도 (『동아일보』 1920.7.12) 1920년 10월 31일 출옥한 후의 박인호 선생 (국가보훈부 제공) 6 · 10만세운동 당시 서울(현재 태평로)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