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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 나 孤立된 차량을 包圍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 민들에게 包圍된 계엄군의 裝甲車에서 最初의 發布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散發的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大規模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集結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 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시위대는 전라남도 道廳을 지키는 軍警을 포위하고 接戰을 계속하였으며 시위는 밤까 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정보도를 못하였던 MBC와 노동청, 세무서 등이 시위대에 의해 불탔다. 전남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전 지역이 시민의 손에 掌握되었으며 시민에 몰린 공수부 대는 20일 밤 11시 경 시위군중을 향해 集團發砲를 감행하였다. 광주역 앞의 시위대는 날이 밝자 이때 死亡한 두 구의 시체를 리어카에 싣고 도청으로 향하였다. 20일부터 도시빈민과 노동자들도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양측에서 사상자가 발생 하였으며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되었다. 많은 희생자를 냈던 20일 밤의 충돌로 시민들 은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21일 오전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군용차량을 탈 취하였다. 이에 계엄군은 정오 경 도청에서 시위대에 조준사격을 하였으며 결국 시민들은 무장을 위해 오후 1시 경부터 화순·해남·나주 등 광주의 인근 시외지역에 진출하여 무기를 탈취 하였고 농민도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오후 3시 경부터 시민들에게 무기들이 지 급되어 계엄군과 시가전이 벌어졌다. 시민봉기가 무력항쟁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겼다. 21일 오후 5시부 터 8시 사이에 계엄군은 광주에서 외곽지역으로 퇴각하였다. 5월 22일 아침부터 27일까 지 광주를 장악한 시민군은 자치활동을 수행하였는데 23일 오후부터 매일 오후 2시에 민 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투쟁목표를 재확인하려 하였다(26일에는 오전 11시 30분 과 오후 3시 2차례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