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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編 순국열사 및 독립운동가 • 53 즉 @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 인본문화(A不文化)의 건설 이 그것으로, 오늘날 정치 · 경 제 · 사회 · 문화의 지향점을 80여 년 전 그가 이미 설파 하고 있었던 것 이 다. 그의 3본주의는 손문(孫文)의 3민주의(三民포義) , 조소앙의 3균주의(三均主義)보다도 수 년 내지 20여년 앞선 선각(先覺)이 었음에도 커다란 조명을 받지 못함이 매우 안타깝다 하 겠으나, 향후 많은 학자들의 연구여지를 남겨 역설적으로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 이다. 그의 사상과 이 념은 조국광복 이후에도 이어 져 서상일, 김성숙, 안호상과 더불어 창당한 민주혁신당(당수 : 신숙) ,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여 백남훈, 조경한, 이인, 전진한 등과 함 께 결성한 민권수호 국민총연맹(대표지도위원 : 신숙), 4 . 19혁명 직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김창숙, 이강, 김병로 등과 결성한 국민각계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 신숙)를 통하여도 。 관되 게 주창(主p昌)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중단 없이 그의 사상과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 왔는데, 민족의 분단은 그 의 생애를 통하여 가장 커다란 아픔이 었다 백범 김구 우사 김규식과 더불어 남북협상에 왕반하면서 김두봉, 김일성 등을 설득하여 통일조국을 이루고자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 못 하였고, 5천년 문화민족이 이민족(異民族)의 통치하에서 안정을 찾고 근대조국을 건설할 수는 없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반탁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풍찬노숙의 해외 망명생활이 고통스럽던 시절 임종하지 못한 선대부인의 수묘생활 을 하면서 유시(遺詩)를 남겼는데 「태어남에 재능은 졸렬하지 않았으나 집안이 극히 빈고 하여 학문을 이루지 못하였고 자라서는 큰 뜻을 품었으나 시절이 불리 하여 아무것도 이 룬 것 이 없노라(生而才 非꽤갯 學而不成 長而風抱大志 時不利 萬팽:未成)J 라며 자괴(딘塊)하 였던 당시의 상황이 너무도 생생하다 제국주의 침략에 희생당한 약소민족의 아픔을 딛고,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살리고자 처절하게 투쟁하였던 강재 신숙의 정신세계는 우리의 「민족 정기」 바로 그것 이 라 하겠다. 강재 신숙 가(家) 독립투쟁사의 이해를 둡기 위하여 아래의 논문, 기사, 평설 등을 첨부하니 일독하기 바라며 자세한 내용은 강재 신숙 저 「나의 일생J (2000년 9월 30일 국학자료원 긴J을 참고하기 바란다. l. 강재 신숙 선생 공적 개요 (국가보훈처) 2. 강재 신숙 선생 약력 (국가보훈처) 3. 신숙의 생애와 민족운동 (수원대 조규태 : 근대사) ※ ( ) 내는 당시 직책 또는 기관, 단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