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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선은 1907년 박매지의병장과 함께 지리산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맹활약했다. 그는 특히 군자금 모집책으로 활약했으며 1908년 4월 25일 악양면 입석에서 체포되어 탈출을 기도하다 총상됐다. 공훈록 : 일제는 1904년 2월 한국 침략의 경쟁국인 러시아 군대를 기습공격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한일의정서를 강제하여 한국을 그들의 전쟁기지로 삼았다. 그런 다음 같은 해 8월에는 한일협약으로 고문정치를 강요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장악하여 갔다. 이어 1905년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더니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1907년에는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완전 장악한 후 군대마저 강제 해산하였다. 이제 대한제국은 자주권을 잃어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의 해산 군인을 비롯하여 새로이 많은 인사들이 거의하여 의병전쟁을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갔다. 아울러 의병진의 전력도 증강되어 전국 곳곳에서 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1907년 이후 1909년까지의 의병 전사자가 10만 명으로 알려질 정도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들의 항쟁은 처절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박광선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1908년 4월 의병진에 입진하여 국권회복에 나섰다. 그리하여 주로 경남 하동(河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같은 해 4월 25일 일경에게 피체되어 경남 하동 화개하면(花開下面) 부근으로 연행되던 중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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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선은 1907년 박매지의병장과 함께 지리산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맹활약했다. 그는 특히 군자금 모집책으로 활약했으며 1908년 4월 25일 악양면 입석에서 체포되어 탈출을 기도하다 총상됐다. 공훈록 : 일제는 1904년 2월 한국 침략의 경쟁국인 러시아 군대를 기습공격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한일의정서를 강제하여 한국을 그들의 전쟁기지로 삼았다. 그런 다음 같은 해 8월에는 한일협약으로 고문정치를 강요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장악하여 갔다. 이어 1905년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더니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1907년에는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완전 장악한 후 군대마저 강제 해산하였다. 이제 대한제국은 자주권을 잃어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의 해산 군인을 비롯하여 새로이 많은 인사들이 거의하여 의병전쟁을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갔다. 아울러 의병진의 전력도 증강되어 전국 곳곳에서 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1907년 이후 1909년까지의 의병 전사자가 10만 명으로 알려질 정도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들의 항쟁은 처절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박광선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1908년 4월 의병진에 입진하여 국권회복에 나섰다. 그리하여 주로 경남 하동(河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같은 해 4월 25일 일경에게 피체되어 경남 하동 화개하면(花開下面) 부근으로 연행되던 중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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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선은 1907년 박매지의병장과 함께 지리산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맹활약했다. 그는 특히 군자금 모집책으로 활약했으며 1908년 4월 25일 악양면 입석에서 체포되어 탈출을 기도하다 총상됐다. 공훈록 : 일제는 1904년 2월 한국 침략의 경쟁국인 러시아 군대를 기습공격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한일의정서를 강제하여 한국을 그들의 전쟁기지로 삼았다. 그런 다음 같은 해 8월에는 한일협약으로 고문정치를 강요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장악하여 갔다. 이어 1905년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더니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1907년에는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완전 장악한 후 군대마저 강제 해산하였다. 이제 대한제국은 자주권을 잃어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의 해산 군인을 비롯하여 새로이 많은 인사들이 거의하여 의병전쟁을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갔다. 아울러 의병진의 전력도 증강되어 전국 곳곳에서 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1907년 이후 1909년까지의 의병 전사자가 10만 명으로 알려질 정도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들의 항쟁은 처절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박광선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1908년 4월 의병진에 입진하여 국권회복에 나섰다. 그리하여 주로 경남 하동(河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같은 해 4월 25일 일경에게 피체되어 경남 하동 화개하면(花開下面) 부근으로 연행되던 중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