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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 노응규 의병장 공훈록 노응규의 본관은 광주(光州)로 경남 안의군(安義郡;현 咸陽) 안의면 당본리 죽전동(安義面堂本里竹田洞)에서 노이선(盧以善)의 2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재질을 타고난 그는 전통적인 유학 공부에 힘썼다. 당시 영남유림의 권위로 알려진 성재 허 전(省齋 許 傳)의 문하에서 배워 30세 전후에 문장을 훌륭하게 지을 수 있는 선비로 숙성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이고 경직된 성리학이나 예론(禮論)에 사로잡히거나, 일신일족(一身一族)의 영달만을 생각하는 고루한 선비는 아니었다. 그는 강화도조약(1876)후 밀려드는 외세의 침략 아래 항상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우국 충군(憂國忠君)의 선비였다. 30세 전후에 지리산록(智異山麓)의 벽지 안의로부터 눈을 돌려 멀리 기호지방까지 덕이 높은 선비를 찾아갔다. 특히 위정척사(衛正斥邪)로 이름이 높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을 찾아 사사(師事)하고,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입재 송근수(立齋 宋近洙)에게로 나아가 학문을 연마하고, 국가사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때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에게 한반도 내에서의 정치적 우위를 빼앗기게 되자,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어 단발령을 내렸다. 이에 대항하여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1895년 10월 11일 밤중에 임최수(林最洙)·이도철(李道徹)·김재풍(金在豊) 등이 친일정부의 대신들을 처단하려는 사건이 있었다. 노응규도 그들과 약속하고 12일 새벽을 기하여 경복궁의 건춘문(建春門)을 열고 들어가서 궁중 수정전(修政殿)에 머물고 있던 대신들을 죽일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친위대의 공격으로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1896년 1월 7일 노응규는 다시 안의에서 거의하였다. 그는 평소에 규합해 두었던 승려 서재기(徐再起)를 선봉장으로 삼고, 문인 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최두원(崔斗元)·최두연(崔斗淵)·임경희(林景熙;前司果)·성경호(成慶昊) 등과 더불어 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