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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규공과 의성김씨 유곡여사 사이에 1906년 10월 6일에 삼남 삼녀의 막내로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 간경리 766번지에서 태어나셨다. 풍모준수하고 총명과단하여 절의감이 강했다. 유년시절에 한학을 수학하였고 청도 김씨 성곤공의 장녀 명화여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정달 정희 진수(광열) 진애 진영 진옥을 두셨다. 선생은 1926년 4월 교남(대륜)학교 3학년 때 일본대학 정치과에 입학했다. 동경에서 조선청년동맹에 활동한 이유로 그해 7월에 퇴학당해서 귀국하였다. 1927년 6월, 대구청년연맹의 집행위원이 되었고 그해 12월 8일 신간회를 조양회관에서 개최하여 간사및 전국 대의원과 경북지부대표 12년엔 연합대표가 되었다. 1929년 7월에 선생은 동지를과 식민통치에 극렬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대구학생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되어서 경북경찰부 고등경찰에 검거되었다. 1930년 3월 11일에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1년형이 선고되어 옥고중 동년 9월초 조선은행폭탄사건의 장진홍의사 옥중순국과 박열 열사부인 옥사사건에서 함께 수감중인 진우연맹원들의 항의시위와 파옥에 선생도 적극 가담한 죄로 징역8개월을 추가 선고받고 그 익년 11월 13일에 출옥하셨다. 선생은 일제 강압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엄한 감시에도 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과 여성들의 나라사랑 교육과 계몽운동에 열중하셨다. 1943년 5월경 일제와 투쟁하는 독립군조직운동이 탄로가 되어 유치장과 형무소에 구금되었다. 1945년 봄 옥고로 득병하여 병보석 되었으나 곧 재 수감되고 고문에 건강 악화로 보행을 못하여 사위 소기령에 업혀서 재판받던중 판결전에 8.15광복이 되었다. 선생은 고된 영어생활에 건강을 잃으셨으면 1950년 3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