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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전 여재와 순국. 1919년 8월 24일 한국 유림 대표 면우 선생이 다전 여재에서 타계하자, 문인 심산 김창숙이, "기미년 봄에 면우 곽선생께서 전국 유림을 통솔하여 파리 만국공회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일로 대구 감옥에 구슴되었다가 순국하시니, 온 나라에서 천하의 선비가 돌아가셨다"가로 선생의 순국을 애도하였다. 앞서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이듬해에 이름을 도(鋾), 자를 연길(淵吉)로 고치고 망국의 죄인으로 자처하다가 1919년 봄,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유림 대표로 파라장서를 작성, 전국 유림 137인의 서명을 받아 강화회의에 보내 대한의 독립을 요청하였다. 이 사건에 놀란 일제는 선생을 대구 감옥에 가두고 2년 형을 선고했다. 병으로 출소한 그해 8월 제자에게, "그대들은 모름지기 먼 훗날을 위해 계획해야지, 한때를 위해 힘쓰지 말라."라고 당부한 뒤 영면하였다. 24일 사시(巳時), 향년 74세였다. 선생의 다전 이거(移居)는 1896년 10월이었다. 비좁은 살림집에 손님이 넘쳐나자 1903년 여재(如齋)를, 1915년에 인재(寅齋)를 신축한다. 여재란 "집의 형식을 겨우 갖추었다"라는 의미이고, 인재는 건물이 동북쪽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이른바 다전 강학당이다. 학당이 완성되자 구국의 지혜를 구하려는 국내외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욱 늘어나는데, 특히 중국 국민당 손문의 막료 이문치(李文治)와 만해 한용운의 방문이 눈길을 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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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와 파리장서운동. 곽다전(郭茶田)으로도 불리던 선생의 이름은 종석(鍾錫)이요,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俛宇)다. 1846년 6월 24일 단성면 남사 태생으로 본관은 현풍이다. 선생은 이른 나이에 유고 경전은 물론 도가와 불경 제자백가 등도 두루 섭렵하다가 20세부터는 주자학에 마음을 돌렸다. 25세에 한주 이진상의 문하에 나아가 심즉리설(心卽理設)로 의견을 나눈 뒤 한사류차(閒思類箚), 이결(理訣)등을 제출하였다. 33세에 문을 드나들 때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아호를 면우라 하고 한주의 이학종요(理學綜要)를 교감했다. 1883년 춘양 학사촌에 13년간 머물다가, 51세가 되던 1896년 봄에 유주하 등과 각국 공관에 일본의 폭거를 규탄하는 천하포고문을 전달하고 10울에 거창 다전으로 옮겼다. 7년 후인 1903년 나라의 부름으로 상경하여 고종을 독대하고 시무4책(時務四策)을 올렸다. 삼세추존과 벼슬을 내렸지만 사직하고 돌아왔다. 파리장서, 일명 한국유림 독립청원서는 2,674자에 달하는 긴 글이라 장서(長書)라고 한다. 문인 김창숙이 중국 상해에서 영문본을 해외로 한문본은 국내 각 서원에 발송하자 조선총독부는 '유림단사건'이라고 하여 관련자들을 검거가 시작되었다. 선생은 4월 18일 거창 헌병대로 압송된 뒤 곧 대구 감옥에 구금된다. 한국 유림 통합의 산물인 장서는, 유학의 원리인 이(理)를 재해석하여 어두운 시대를 극복하는 이념으로 삼았다. 서국의 민족자결론이나 국가주권론에 기대지 않고 유학의 기본 철학인 도덕관에 기초한 생명 존중 사상이 그 바탕이었다. 즉 모든 민족과 국가는 자주독립의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논리로 세계를 설득하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유교적 이념에 따라 작성한 장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엄중한 질책이며, 그들의 반성을 촉구한 선언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