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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박동완 선생 51 으로 1915년 12월 7일 창간된 『기독신보(基 督申報)』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였 다. 이 무렵 정동제일교회에 전도사로 시무 하는 한편, 조선중앙YMCA 위원 등을 역임 하며 교회와 사회의 접점지대에서 활발한 활 동을 펼쳤다. 1919년 2월 하순 박희도를 만 나 그의 권유로 뒤늦게 3·1만세운동에 합류 하였다. 2월 27일 낮 정동제일교회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열린 기독교계 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추가 선정되었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열 린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 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전 화를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복심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 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법정진술에서 평소 민족의 독립을 바라고 있었고, 3월 1일의 독 립선언으로 조선은 독립되었고 자주민이 되 었으며, 민족자결은 그렇게 독립한 뒤에 우 리가 우리나라의 정치를 하는 것이라 생각한 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징역 2년형 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 일 오전 만기 출옥으로 마포 공덕리 경성감 옥의 문을 나섰다. 기독신보 주필로 연설에 나서. “의로운 청년 이 되라” 출옥 후 『기독신보』 주필과 조선중앙 YMCA 위원 등을 맡아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 때 중앙YMCA 일요 강화(講話)에 연사로 나서 ‘천국이 근(近)하리라’, ‘의로운 청년’ 등 을 화두 삼아 민족의 독립이 가까워 왔음을 암시하며, 청년들에게 정의와 인도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산업과 교육의 장려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유성준·이갑 성·김윤수·장두현 등과 함께 1923년 1월 서 울에서 발족한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로 참 여하고, 이상재가 회장으로 있는 조선교육협 회에도 관여하였다. 출옥 후 활동은 여러 방면에 걸쳐 있었는 데, 주요 활동공간은 주로 교계언론 분야였 다. 『기독신보』의 주필로 있다가, 1923년 7 월 조선기독교창문사에서 잡지 『신생명(新生 박동완의 재판 판결문(왼쪽, 국가보훈부 제공)「일제감시대상인물 카드」에 실린 옥중의 박동완 사진(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