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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박인호 선생 51 (東學)을 처음 접했다. 곧바로 충청남도 목천 군에 머무르던 최시형(崔時亨)을 찾아가 동학 에 입교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제2차 봉기에 참 가하여 10월부터 해미·덕산·예산·온양·당진· 홍성 등 충남 일대에서 정부군·일본군과 전투 를 벌였다. 이중 충남 당진군의 승전곡 전투 와 충남 예산군의 신례원 전투를 승리로 이끌 었다. 10월 말 홍주성(洪州城) 전투에서 패한 후에는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예산에 있는 금 오산에 토굴을 파고 살다가 청양의 칠갑산으 로 옮겨 오두막집을 짓고 은거하였다. 1901년 이후 손병희가 일본에 망명하여 문명개화운동을 추진할 때는 심복으로서 주 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평안도·황해도 등의 서북지방을 돌며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동학 포교 활동을 펼쳤다. 1904년 에는 문명개화의 정치운동을 위한 민회인 대 동회(大同會)를 조직하였다. 대동회는 중립회 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진보회(進步會) 로 개명하였다. 1904년 펼쳐진 진보회를 통 한 민회운동을 천도교에서는 갑진개화운동 이라 부른다. 천도교 정비와 계몽 활동 1905년 12월 1일 동학이 천도교(天道敎)로 개편된 후에는 핵심적인 지도자로 활약하였 다. 1906년에는 금융관장(金融館 長) 등의 주 요 직책을 맡으며 충청도 조직 기반을 다지 는 활동을 펼쳤다. 1907년 12월 10일 대도주 (大道主) 김연국(金演局)의 다음 자리인 차도 주(次道主)에 올랐다. 김연국이 일진회의 이 용구가 이끌던 시천교(侍天敎)로 이적하자, 1908년 1월 18일 4대 대도주가 되어 제일 먼 저 교단 정비에 나섰다. 대외적으로는 재정 적 어려움에 처한 보성소학교·보성중학교·보 성전문학교와 동덕여학교·양덕여자소학교· 문창학교 등을 인수하여 경영하였다. 은밀히 3 · 1운동을 지원하다 그는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 인’에 포함되지 않았다. 천도교를 대표하여 박인호 선생 생가터(천도교중앙총부 제공) 최초의 천도교중앙총부 건물(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