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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경남지역 후기 의병 봉기와 일본군의 의병 탄압 51 의병대의 토벌 임무를 맡 겼으며, 지리가 험하거나 수비대로부터 거리가 먼 곳에는 필요에 따라 척후 를 두어 의병에 대한 감 시망을 조밀하게 구성하 였다. 1908년 초 일본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경북 북부지역 의병세력 중 일부가 일본군의 예 봉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 하자 일본군 수비대 또한 울산과 경주 일원 등 영남 동남부 해안지역을 중심 으로 의병에 대한 수색과 공격 등 군사행동을 강화 하였다. 이 시기 일본군 제14연대가 제3대대 본부를 경주로 옮겨 수비구사령부를 설치한 것도 그러한 의 병세력의 움직임과 연관이 있다. 즉, 제1대대와 제2대대의 수비대 병력을 동원하여 각각 경북 북부지역과 호남지역의 의병에 대한 진압 을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3대대 병력을 동 원해 동해안 태백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경 상남도와 경상북도 사이의 산악지대에 새 근거지를 마련한 의병대에 대한 ‘토벌행동’에 주력하였던 것 이다. 양산 출신 서병희가 의병대를 결성하고 윤정 의(尹政儀) 등과 협동으로 양산, 언양, 울산 일원의 경남 동부지역과 경주지역을 오가며 의병투쟁을 전 개했던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경상남도 동부의 도 접경지역에서 의병세력에 대 한 집중적인 공격과 검거로 이 지역의 의병활동이 다소 진정되는 효과를 거두자, 1908년 4월 19 일 일 제는 광주에 주둔해 있던 제2대대 본부를 진주로 옮 기면서 진주수비구를 새로 설치했다. 이러한 수비구 변동은 의병 진압의 예봉을 지리산‧덕유산과 인접 한 경남 서부지역으로 돌려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경남 서부지역의 의병 토벌을 염두에 두 고 수비구를 재편한 일본군은 1908년 11월 수비구 를 다시 재편할 때까지 경남 서부지역에 병력을 집중 시켜 덕유산과 지리산 인근의 의병세력에 대한 대대 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때 박동의, 유종환, 전성범, 박매지 등 경남 일대의 유력한 의병장들이 일본군 토벌대와의 교전 중 전사하거나 일본군에 의 해 체포된 뒤 학살되었다. 이때 일본군은 소규모 위 주의 유격전을 벌이는 의병대를 토벌하기 위해서 수 비대 병력 단독 행동보다는 경찰 또는 헌병과 합동으 로 토벌대를 편성하기도 하고, 변장대를 편성하여 잠 함양 상림공원 내의 역사인물 동상. 문태수(문태서), 윤일이(권석도) 등 한말 의병장 흉상이 역 대 영남 인물의 흉상과 함께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