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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희산 김승학의 《독립신문》 발간과 『한국독립사』 편찬 전말 51 원에 안장되자 마자 그 다음날 공보처로부터 무기 정간을 당했다. 김구 암살 의혹을 사설에 실었다는 것이었고, 보다 큰 이유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 지라는 것, 절대 독립을 지지했다는 것,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독립신문》 발간에 대한 김승학의 집념은 끝이 없 었다. 이승만정권이 물러난 후 일찌감치 서울로 올 라온 그는 『한국독립사』 편찬을 서두르는 한편, 또 다시 ‘《독립신문》 제4차 속간 초안’까지 작성해 놓 고 때를 기다렸으나 숙환으로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팔다리가 부러지는 악형을 이겨낸 『한국독립사』 편찬 김승학이 광복이후 가장 심혈을 쏟은 부분은 독립 운동사 편찬이었다. 『한국독립사』는 『한국통사』(박 은식, 1915)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 1920) 의 맥을 잇는 업적으로 평가된다. 김승학은 『한국 독립사』 자서(自序)에서 “내가 일찍 조국광복을 위 한 운동대열에 참여하여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발 행할 때, 백암 박은식 선생이 편저한 『한국통사』라 는 ‘나라를 잃은 눈물의 기록’과 『한국독립운동지혈 사』라는 ‘나라를 찾으려는 피의 기록’을 간행할 때, 그 사료 수집에 미력이나마 협조하면서, 다음번에는 『한국독립사』라는 ‘나라를 찾은 웃음의 역사’를 편찬 하고자 굳은 맹약을 하였다.”라는 회고가 그것을 뒷 받침한다. 김승학이 백암 박은식과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모두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 1822~1894) 선생 의 문인(門人)들이기 때문이다. 운암은 관서지역에 독립신문 중문판의 관동대지진 보도 기사(1923.11.  14). 「震災時 日政府 虐殺韓嶠之大陰謀 發見」이란 기 사 제목으로 보도하고 있다. 2면에는 중국인에 대한 호 소문을 게재하여 일제의 기만적 선전에 속지 말라고 호 소하였다. 독립신문에 실린 관동대지진 희생 한인 조사 통계 및  추도행사 보도 기사(1923.12.5). 추도문과 추도가도  실려있다.(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