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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임시정부의 국군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51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통합운동은 조직 방법론, 사상적 대립 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30년을 전 후해 민족주의 운동세력은 크게 남만주의 조선혁명 당·조선혁명군, 북만주의 한국독립당·한국독립군으 로 양립되었는데 그는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겸 한 국독립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지청천 은 일제의 만주 침략이 중일전쟁으로 확대되고, 나 아가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내다보면서 독립전 쟁의 기세를 높일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가 이끈 한 국독립군은 때로는 중국 항일군과 연합전선을 펴 면서 수많은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1932년 초 북만주지방 여러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같은 해 9월과 11월 전략적 요충지인 하얼빈 부근의 쌍성(雙城)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북만주를 떠나 동만주로 이동했고 1933년 초에는 경박호(鏡 泊湖)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연합부대를 격멸한 뒤 6월 초에 동경성(東京城)전투에서도 승리했다. 특히 1933년 6월 말에는 반만주국(反滿洲國) 항일 세력 토벌로 악명이 높던 간도임시파견대(1,60 0명) 를 상대로 한 대전자령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군 복 3,000여 벌, 소총 1,500정 등을 노획한 대전자령 전투는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와 함께 독립전쟁 3 대 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같은 해 9월 일제의 군사 적 거점인 동녕현(東寧縣) 공격 이후 일제의 대규모 반격으로 한국독립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 지 청천은 부상을 당했고 중국공산당의 공작으로 중국 구국군에 체포되었다. 한국독립군은 일제의 만주침략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그렇지만 일제의 만주 지배가 공고해진 데 다가 한중연합군의 내분으로 한국독립군은 매우 어 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 무렵 중국국민당 장제스(蔣 介石)의 지원을 받게 된 임시정부는 군사학교 설립 을 추진하면서 총책임자로 지청천을 초청했다. 이에 지청천은 중국 관내에서 무장력을 길러 장기 항전을 벌일 것을 결심했다. 1933년 10월 독립전쟁의 최전 선인 만주를 뒤로 한 채 중국 관내로 옮겨갔다. 지청천의 한국독립군이 대승을 거두었던 쌍성 승은문(서문)과 대전자령(중국 연변 나자구).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