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page

이달의 순국선열 • 남궁억(南宮檍) 선생 51 이외에 인민의 교육계몽과 민족교육에 앞 장서기 위해 전국적으로 지역별로 단체들을 조직하였는데, 강원도 출신들로 관동학회를 조직하여 1908년 4월 2일 회장에 임명되었 다. 그리고 1908년 6월 25일 대한협회에서 국민교육과 사회계몽을 실행하기 위해 『교육 월보』를 창간하여 10개월 동안 발행하였다. 이 잡지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발행한 우리나라 교육사상 최초의 교육 잡지이며, 통신 강의록이었다. 기독교 입교 동기는 『윤치호일기』에 의하 면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요량으로 교회에 다 니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돈이 었던 윤치호의 영향이나 권유를 받아 감리 교인이 되어 1910년 11월 종교교회에서 세 례를 받았다. 그리고 1915년 남감리회 매 년회에서 ‘본처전도사’라는 직책을 받았다. 1929~30년 매년회 회록에선 ‘임명받지 아니 한 본처전도사’로 나오고 심문조서에는 ‘명예 전교사’ 또는 ‘명예전도사’라는 직분으로 기록 되어 있다. 학생들에게 애국가사와 무궁화 보급 민족 의식 고취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1918년 강원 도 홍천으로 갈 때까지 배화학당에서 8년 동 안 교편을 잡았다. 교사 시절 학생들 상황에 맞게 적당한 교재를 손수 만들어 가르쳤다. 기독교의 진리를 기초로 배화학당의 이념과 ‘현모양처주의’ 교육사상과 애교심을 강조한 배화학당의 교가도 직접 작사하였다. 배화학 당 교사시절 가정교과서인 『가정교육』을 저 술하여 가정에서 주부 역할의 중요성과 유아 법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한글 궁체를 배워 학생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쳤으며, 1914년 12월에는 『신편언문체법』을 발행했다. 또한 배화학당 시절 조선 13도를 무궁화로 수놓은 자수본을 고안하여 무궁화보급운동을 시작 하였다. 무궁화 자수본은 집집마다 벽에 걸 고 혹은 선물로 미국이나 하와이 등지로 나 가는 등 전국적으로 유행하여 사람들에게 독 립의 의지를 심어주었다. 배화학당 교사시절 상동청년야학원에서도 교사로 일했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신민 회 사건으로 체포당하여 고문 후유증으로 더 이상 재기할 수 없게 되자, 50세 에 상동청년야학원 원장을 맡았다. 낮에는 배화학당 에서 야간에는 당시 젊은 학생들의 정신적 신앙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였다. 홍천에 모곡 학교 설립, 농촌청년들 에게 독립정 신 고양 1918년 12 월 서울 생활 남궁억이 고안하여 보급한 무궁화 자수 한반도 지도 와 무궁화(국민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