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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가평의 얼과 인맥 그의 차녀 최백경(崔百柳)은 깅-재 신숙의 처로서 국내외에서 의병과 수많은 독립군의 뒷 바라지로 형극의 삶을 마다하지 않은 숨은 애국지-이다. 그는 집에서 남의 책을 빌려 통감, 맹자 동을 독학한 후, 가평의 서딩-인 기남강사(仍南팎 舍)에서 이규봉(李圭凰) 선생을 스승으로 소학, 중용, 대학, 서전 등을 섭렵하였는데, 스승 이규봉은 그에 대하여 “一땀聊記(일람첩기: 한번보고 쉽게 기억하고)하고 十行맺下(십행구 하: 열 줄을 함께 읽어 내리는 등)하는 略明(총명)과 見末범本(견말오본; 일부를 보고 근본 원리를 깨우치며)하는 慧能(혜능: 슬기로운 능력)과 愛敬隆親(애경융친: 어른을 공경하고 어 린이를 사랑하며, 일가친족을 융승히 예우)하는 禮偉(예의)와 寫作댈佳(사작구가)의 才品(재 품)이 어느 모로 보든지 쟁13黨州聞(향딩주여; 이 고장 여러 동네)에서 稱許(칭허)하는 꽤童 (신동)일시 分明(분명)하였다"고 술회하였듯이 그는 어려서부터 지혜가 출중한 신동이었다. 그는 소년시절 이준 열사와 교유(交遊)하였는데, 이 때 이준 열사가 써준 격문은 그의 인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비는 항상 스스로 격앙하여 고금학문을 배우는 데 마음을 바치고 성현의 사업에 힘 을 기울여 일등인물로 자처하여야 한다 (士當常띔激문 致心於 古今學文 用力於 聖贊事業 以-等人物 自處也).JJ 그는 1894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청 · 일군의 출병으로 촉발된 청일전쟁의 와중 에서 경복궁이 점령딩-히-고,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낭인들에게 시해당하는 상황을 경험하 면서 민족의식을 싹퇴웠던 것 같다. 또한 을미의병으로 활약하였던 부친 신석범의 실천적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으며, 동학에 입도한 후 의암 손병희(義輩 孫秉熙)의 교화에 힘입어 사상체계가 확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모화사상(薦華思想)에 젖은 이인수(李寅秀)의 「대한제국과 광무를 칭하는 것은 제 후가 왕을 참칭하는 것과 같다」 라는 견해에 대하여 「제후가 왕이 되고 상놈이 양반이 되는 것이 무엇이 안 된 일이냐」 라고 일갈하면서 만인 평등의 박애사상과 사인여천(事人 如天: 사람 대하기를 하늘처럼)의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 사상을 갈파하였던 점에 서도 그의 사상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부패하고 무능한 기존의 지배질서를 비판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저버린 채 사 대주의에 함몰된 매국노들에 대한 처단의지가 매우 단호하였다 그의 이러한 성향을 1906 년 친일주구 일진회장 이용구 암살미수 사건, 1922년 망명기 박재혁(朴在麻) 의사를 동경 에 밀파하여 미국의원단의 일본방문 환영식장 폭파를 기도하는 등, 독립운동사에 있어 최 초로 의열투쟁의 문을 열기도 하였다. 1903년 동학에 입도 후 상경하여 설립한 청파문창학교 출신 이봉창(李꿇릅) 의사의 쾌거 도 그의 사상적 훈도에 연유한 바 있으리라 유추함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강재 신숙의 사상은 1919년 국내에서 조직된 통일당(총리 : 신숙)의 강령을 통하여 구체 화되었는데, 이후 1920년 상해에서 재건되었던 통일딩, 김좌진 피살 후 북만의 중동선 연 변 위하현에서 조직된 한국독립당 강령으로도 이어지고 있는 바, 3본주의(三本主義)로 요 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