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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침략의 암울한 시대에 그들에게 항거하여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김용응 김태규선생 부자가 있으니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서 태어났다. 용응은 병농이란 이름으로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기위해 활약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아들인 태규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3.1운동 당시부터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으니 파리강화회의와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중국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또한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고 독립사상을 고취하기위한 목적으로 1919년 5월 연병호 안재홍등과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재무부장에 추대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더욱 외교시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키고자 하였으며 대한애국부인회와의 관계로 그의 활동이 발각 체포되어 1년의 형을 받았으니 1920년의 일이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여기에 이분들의 공적을 적어 의맥이 이땅에 길이 전승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비를 세우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