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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서 본적 : 경기도 김포군 대곶면 초원지리 423번지 주소 : 상동 성명 : 정인섭 직업 : 서당교사 정인섭애국지사는 상기 주소지에 거주한 사람으로 일찍이 조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되어 각종 탄압과 박해로 국민들이 나날로 비통한 처지에 놓여있고 자유를 잃은 조국의 백성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글이 있어도 쓰지를 못하며 식량이 있어도 먹지를 못하는 노예생활을 방불케하는 최악의 사태에 이르렀음을 통탄한 나머지 분연이 젊은 2세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조국의 뿌리를 계승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상기 거주지의 사재를 들여 초원학습 강습소를 설립하여 스스로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학양성에 전념함으로 조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초석을 다지는 한 편, 자택 다락방에 매일 친지와 가족들은 모아놓고 자주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태극기를 만들어 은밀히 보관하여 놓고 기회를 엿보던 중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손병희선생을 위시한 33인이 중심이 되어 경향각지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가열됨에 따라 상기 정인섭은 스스로 무명천에 "조선독립만세"라 써두었다가 3월 23일 오후 4시경 양곡리 장날에 운집한 3~4백명의 군중속에 뛰어들어 본인이 갖고 있던 대나무에 태극기를 달고 휘두르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군중을 인솔하고 시가지를 통과하여 주재소(현 파출소)와 면사무소등지로 계속 전진하던중 주재소 순경의 해산명령에 불복하여 강행하다가 주모자로 연행되어 구속되었으며 대정8년 5월1일 경성지방법원 조선총독판사 금천광길및 관여 조선총독부 검사 최호선으로부터 징역1년 실형선고를 받고 복역하면서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대정8년 6월 2일(항공 제339)에 의거 기각되었고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대정 8년 7월 10일(형상 제364호)로 기각됨과 함께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다가 구속된지 2년만에 형기만료로 출감후에도 계속 주재소 순경 형사들의 감시와 가족 친지들의 행동규제등 형언키 어려운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중 옥고에서 치른 신체적 장해요인과 지병으로 해방 조국의 모습을 못 본채 별세하였으며 그 후 자유당시절에는 (정인섭)씨 묘소에 군청에서 비석을 세우고 매년 3월 1일을 기하여 군내 각급 기관장및 유지가 제사음식을 직접 준비하여 제사를 지냈으나 5.16이후 중단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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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대전 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 390호 1919년 경기 김포군 양촌면 양곡리 장날 군중 4백여명을 동원 손수 제작한 태극기를 휘두루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위를 주동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1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 1922년 초원학술강습소를 설립하여 후학교육에 여생을 바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