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page

50 2025년 9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중국 관내 항일무장조직 조선의용대의 재조명’ 월 동안 교외 조선인 농촌마을에서 지냈는데, 만주 도처에서 조선인들이 중국인 해산군인들의 공격 표 적이 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조선인들은 조선의용군 부대가 자신들의 마을에 와서 숙영하는 것만 해도 안심했다고 한다. 1945년 11월 7일 1천여 명 조선의용군은 심양역 광장에서 거행된 러시아혁명 기념일에 참가하였다. 그날 저녁 오가황(吳家荒)소학교 강당에서 독립동맹 의용군 간부 회의가 있었다. 무정은 회의 결과를 다 음날 오가황소학교 운동장에 집합한 대원들에게 전 달했다. 연로한 독립동맹 간부들은 북한으로 가고 조선의용군은 만주에 남아서, 그리고 만주 각지로 들어가 조선 동포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만주 조선인은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1일 당시 216만 3,115명이었다. ➁ 만주의 항일투쟁 계승 : 이홍광지대 창설(통화) 오가황회의 결정 무렵 중국국민당 군대는 신속하 게 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동맹·조선의용군 대 원들은 빨리 심양을 빠져나가야 했다. 심양에서 새 로 편성된 조선의용군 제1·제3·제5 지대는 각각 남 만주와 북만주, 그리고 동만주(연변)로 이동하는 것 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통화에는 일본군 패잔병 6천여 명이 있었는 데, 그들은 위세를 과시하며 통화의 이곳저곳을 누 비고 다녔다. 특히 이들은 중국국민당 측의 사주를 받아 1946년 2월 3일 폭동을 일으켜 조선의용군과 팔로군을 공격, 이 도시를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를 일찍 파악한 조선의용군의 공격을 받아 폭동 은 무위로 끝났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1946년 2월 하순 통화의 조선 의용군 1지대를 ‘동북민주연합군 이홍광지대’로 명 명하고 북상해온 중국인 부대는 ‘양정우 지대’로 호 칭했다. 일제시기 이홍광과 양정우는 1933년 9월 성 립한 동북인민혁명군 제1독립사(獨立師)의 대장과 참모장으로, 곧 전우로 함께 싸웠으며 둘 다 전사하 였다. ‘양정우’ ‘이홍광’의 명명(命名)은 중국공산당 이 조선인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였음과 함께 중국공 조선의용군 제1지대가 남만주 노흑산(老黑山) 일대의 중국인 토비 (土匪)들을 소탕하하고 난 뒤 기념촬영한 사진 조선의용군 열사기념관 전경(2012년 촬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