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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24년 6월 Special Theme   제14회 ‘의병의 날’ 기념 특집 ‘대한제국기 후기 의병의 봉기와 일제의 의병 탄압’  우수보의 이후 행적은 불명이 다. 중군장 노성화는 수십명의 의병을 이끌고 의령 안간 인근 에서 숙박하던 중 토벌대의 급 습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서병희는 1908년 1월 13도 연합의군의 서울 탈환 작전에 허위의 결사대 300여 명의 선 봉장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서울 탈환 작전 실패 후 허위 의 밀지에 따라 고향인 경상남 도 양산으로 내려와 의병을 일 으켰다. 서병희는 1908년 음 력 2월~5월 울산 경주 양산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 와 수차례에 걸쳐 교전을 벌였다. 또 같은 해 음력 5 월 23일 부하 5명과 함께 각자 총기를 휴대하고 양 산군 하북면 성천점(成川店)에서 일본 상인을 습격하 여 참살하기도 하였다. 서병희는 언양과 양산에 출 몰하면서 김교상(金敎相) 의병대와 서로 기맥을 통 하기도 했으나, 일본인 살해 사건 이후 산청으로 이 동하여 박동의 의병대에 들어가 서부 경남 일대에서 활동했다. 경남에서 활동한 의병대에는 인근 지역주민 뿐만 아니라, 해산군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은 일본군 토벌대와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동시 에 일본군 수비대의 예봉을 피해가며 상대적으로 방 어능력이 약한 주재소나 면사무소, 우편국 등 관아 를 주요 공격 목표로 삼아 반일 의병투쟁을 전개하 였다. 일본인과 우편체송인, 친일세력 등도 의병투 쟁의 주요 타킷이었다. 일본군의 진압과 학살 후기 의병 봉기 때 경남지역 의병에 대한 진압과 학살을 전담한 일본군 제14연대의 기본 편제는 연대 본부와 3개 대대 12개 중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연 대본부는 처음에는 임시로 대전에 설치했다가 1907 년 9월 6일부터 본국 귀환 때까지 대구에 주둔했다. 1908년 2월 일본군 제14연대는 종전 부산에 주둔 했던 제3대대 본부를 경주로 이전한 뒤 관할구역을 대구수비구, 경주수비구, 광주수비구 등 3개 수비구 로 편성하였다. 이때 경주수비구는 경주와 영일 등 경북 동남부 일부 지역, 그리고 함양 등 경남 서부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경상남도의 대부분 지역을 담당 하였다. 각 수비구에는 중대 또는 소대 병력 또는 반(半)소 대 병력의 수비대가 의병의 출몰이 잦은 주요 지역 에 배치되었다. 또 각 수비대는 분견대를 각지에 파 견하여 의병 활동에 대한 감시와 정보 수집, 소규모 윤일이(권석도) 의병장 흉상(함양군 백전면사무소 뒤편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