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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24년 4월 Special Theme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5주년 특집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움직인 지도자들’  교에서 교관을 맡았다. 당시 그와 함께 교관으로 있 던 사람들은 김경천, 신동천, 이범석 등이었다. 지청 천, 김경천, 신동천은 ‘남만(南滿)삼천’으로 불렸다. 당시 만주(중국 동북지방)에는 ‘날으는 홍범도, 뛰는 김좌진’, ‘남만삼천이면 산천초목도 두려워 떤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간부 양성에 주력 했다. 그러면서 1919년에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당시 만주의 다 른 무장 독립운동 단체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군정 서도 국내 진공 작전을 비롯해 다양한 전투 활동을 벌였다. 1920년 들어 일제의 압박이 가중됨에 따라 같은 해 7월 신흥무관학교 재학생과 서로군정서 병력을 데리고 백두산 근처로 이동했다. 그리고 청산리전투 를 치른 홍범도 부대와 함께 대한의용군을 결성하고 (사령관 홍범도) 부사령관을 맡았다. 같은 해 12월 북만주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여 단장을 맡았다. 1921년 1월 밀산의 독 립군 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으로 간 뒤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조직 했고 4월에는 독립군 간부 양성 기관의 설립을 지원하겠다는 원 동공화국의 약속을 믿고 자유시 로 이동했다. 그러나 곧 ‘자유시 사변’으로 무장 독립운동 세력 은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 지청 천은 1921년 독립전쟁을 치를 군사 기간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고려혁명군사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그 렇지만 민족정신을 우선하는 교육 방침 때문에 러시 아 당국과 갈등을 빚어 러시아에 머무는 것이 어려 워졌다. 민족운동의 통일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국민대표 회의가 곡절 끝에 1923년 1월 상해(上海)에서 열리 자 지청천은 군사위원에 선임되었다. 이 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개선을 주장한 개조파와 새로운 조직 건설을 내세운 창조파가 대립 했는데, 그는 독립전쟁을 지휘할 수 있는 ‘통일적 기 관’을 새로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국민대표회 의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다시 독립전쟁을 전개하 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를 거쳐 만주로 돌아갔다. 1924년 10월 8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으로 정의 부(正義府)가 출범하자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이 되 어 항일 무장역량의 강화를 위해 힘썼다. 1928년 5 월에는 18개 단체 대표가 모인 전민족유일당조직회 의에 참석해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애썼다. 그러나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3부 한국광복군 총사령 시절 지청천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