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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배부하는 한편 대구고보 신명학교 등 학생대표에게 학생동원의 책임을 부여하였다. 서울에서 3.1봉화가 오르자 장로는 삼엄한 일경의 감시를 피하면서 이만집등과 회동 3월 8일 큰장날 오후 1시를 기해 거사키로 합의 주도하게 준비중 3일 전에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장로의 주도하에 계획된 자주독을 절규하는 노도와 같은 대구의 만세운동은 성공적으로 수행행되었으며 그후 장로는 대구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셨으니 혹독한 고문이며 엄청난 고애이야 어찌 필설로 표하리오 출옥후에도 빈번한 예비구금을 당하는 등 집요한 일제의 감시와 옥고로 초췌해진 몸을 이끌고 백척불굴 애국운동은 계속되었다. 북경에서 연두공장을 경영하며 그 이윤으로 상해임정에 자금조달과 일제압박으로 곤경에 처해있던 계성학교의 재정을 돕는 한편 YMCA운동 대구상업협회 결성 조양회관 건립에 주도적 역활을 담당 민족혼의 진작에 온갖 심혈을 기울렸으나 이는 살신정인 멸사보국하신 장로의 숭고한 애국애정의 발로인지라 어찌 이땅에 태어난 후세만인의 귀감이라 아니이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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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는 계성학교에서 교감 이사 이사장을 역임하시고 또 희도학교의 설립자이시며 건축 명성회장으로 남산교회를 설립하셨고 도당회장을 맡으시는 등 육영과 전도사업에도 힘쓰시었으며 광복 후 혼란기에는 경북 치안유지 회장 및 과도 미군정에도 관여하시고 입력위원 제헌국회의원 등으로 초창기 건국사업에 헌신하시다가 6.25동란 중 서울에서 대구까지 도보로 탈출하시어 피로 기진으로 1951년 10월 2일 향년 63세로 간난과 영광의 생애를 마치시니 장로의 업적을 기리도록 정부에서는 대통령표창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