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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4월 3일 이 지역으로 파급되어 몇 사람의 천도교인들이 앞장서니 주민들은 너나없이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각처에서 수촌리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행렬을 정비한 천여명의 시위군중은 어은리 은골의 장안면사무소와 화산리 사기말 우정면사무소를 모두 차례로 불태우니 연기가 하늘높이 치솟았다. 흥분한 만세행렬은 쌍봉산에 올라 백의의 인산을 이루어 목청 높이 조선독립만세를 합창하여 천지를 진동시켰다. 군중은 다시 화수리로 행진하여 주재소를 몇 겹으로 포위하니 때는 오훈 5시경이었고 군중은 2000여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때 독립을 부르짖는 시위군중에게 주재소 소장 가와바다가 무차별하게 쏘아대는 총탄에 맞아 세명이 죽고 두 명이 부상하였다. 이 참상을 본 군중들은 분에 넘쳐 투석과 각목으로 치열하게 저항하여 드디어 주재소에 불을 지르면서 달아나는 가와바다를 붙잡아 민족의 이름으로 처형하였다. 군중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다시 자주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쳐 이 나라가 우리의 것임을 만방에 당당하게 천명하였다. 앙심을 품은 일제는 많은 병력을 출동시켜 4월 6일 수촌리를 시작으로 11일 화수리에 몰려와 수일간 갖은 악랄한 만행을 자행하여 사망자 22명 부상자 17명 옥고를 치른 분이 34명 불에 탄 가옥이 백여호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 수백명이나 되었다. 이 곳의 독립운동은 전국 어디에서도 거의 그 짝이 없을만큼 격렬하였으면 그 여세는 바로 4월 5일 이웃 발안시장터로 이어졌고 다시 4월 15일 제암리에서 천추만대의 잊을 수 없는 참혹한 학살을 빚어놓고 말았다. 선열들의 독립만세운동은 뒷날 자주독립의 새싹이 되어 단기 4278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에 3.1운동 70주년을 맞이하여 뒤늦게나마 온 주민들의 정서을 함께 모아 지사들의 거룩한 호국정신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면서 깊고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을 정화하여 두 번 다시 이 땅에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굳게 다짐하는 엄숙한 징표로 이 비를 세운다. 단기 4322년 8월 15일 이종학 삼가 짓고 한동인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