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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하여 상해임시정부가 태동중이라는 소식에 선생은 4월 민강, 김태희등과 상해로가서 그에 참획하는 한편 외교활동과 무력투쟁의 병행을 역설하셨다. 선생은 단재와 함께 대한보를 발행 군사노선을 강조했으나 수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은 서간도에서 김동삼, 이청천, 신팔균, 김격천등과 제휴하여 서로군정서의 참모주임으로 활약하는한편 합니하(?)에서 재건된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법학과 정신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뒤이어 선생은 군정서의 소장파인 이시열, 현정경, 김규환동지등과 군저서별동대 광한단을 조직 직접 무력항쟁에 나서 압록강일대의 일군경을 공격하여 위력을 떨치시었다. 1920년 9월 하순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구실로 아 독립군을 공격해왔다. 이때 선생이 지위한 독립군부대는 선생의 비상한 지모로 일군 1개중대를 섬멸하였으니 이것이 곧 선수평전투이며 청산리대첩의 서전이다. 이러한 빛나는공훈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이름은 대개 숨겨졌다. 이는 이범석장군의 말씀처럼 선생은 공을 딴사람에게 돌리거나 익명으로 행도하는것을 원칙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승리는 하면서도 후퇴할수밖에 없던것은 후속부대가 없는 독립군의 숙명이었다. 살길은 입소밖에 없었다.그러나 선생의 신념은 만주에서의 투재이지 입소투쟁이 아니었다. 독립군의 비운을 예견한 선생은 서울로 돌아오셨다. 일찍부터 선생은 노농대중문제에 관심이 깊으셨다. 이들은민족의 절대다수일뿐아니라 일제침략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1921년 3월 선생은 박중등 동지들과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그 간부로서 전국 각지를 순회강연하고, 조직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그 기관지 공제의 발행에 참획하셨다. 이와함께 소작조건의 개선을 위한 소작인조합도 추진하셨다. 노동단체의 조직이 확대되자 ?2년 10월 이미 조직돼있던 무산자동지회와 함하여 조선노농연맹회를 조직하였고 한편 홍명희, 윤덕병등과 신사상연구회후에 화요회도 조직하셨다. 운동과 조직이 확대가 거듭되자 4년에는 전국 88개 노농단체대표를 모아 다시 조선노농총동맹을 창립하셨다. 그러나 운동의 기관지인 공제 신생활동등이 일제의 탄압으로 연이어 취소되니 그 기능은 거의 ??되었다. 이에 대한 투쟁을 공감한 선생은 여러 언론인과 협의하여 언론인투쟁단체 무명회를 조직 그간사로 활약하셨다. 그러나 가중되는 탄압속에서 일제의 투쟁함에는 보다 강력한 조직이 필요했으므로 각 언론사회단체대표들과의 협의하여 4년 6월 언론집회압박탄핵회를 결성하고 선생은 안재홍, 김병로등과 그 실행위원이 되어 투쟁에 앞장스셨다. 이무렵 선생은 조선일보의 초빙으로 동사 고문겸 사설기자로 활약하셨으며 선생의 보천교성대문으로 친일에 광분하던 그 수가 붕괴된것도 이때의 일이며 또 우리나라 최초로 근로자무료숙박소를 인사동에 만들어 노동자의 복지에 착수한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거라. 선생은 그해 10월 코민테른 극동지역 조선지구 대표사건에 연루되어 피검 다음해 6월 보석 7월에 면소되었으나 이때문에 요시찰로 10년의 행동제한을 당하셨다. 연금생활중에 선생은 홍명희를 통하여 박헌영등으로부터 누차 조선공산당의 창당을 종용받았으나 이를 모두 거절하셨다. 향리에세 선생은 종문의 여러 문물을 새시대에 맞도록 개혁하셨으며 공익조합 산동보통학교등 지역발전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으셨다. 비록 행동이 부자유한 속에서도 형편의 최상한으로 애국애족을 위한 개혁과 자주독립의 노력을 경주해마지않음은 선생의 인품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선생을 더욱 괴롭힌것은 혈맹의 동지요 죽마의 고우이던 단재가 연순에서 옥사하고 그 유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