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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나중소 장군 49 을 설립하였다. 1919년 3 · 1만세운동이 일어 나 조국 광복에 대한 희망이 보이자 중광단 은 국내에서 넘어온 대종교도 등을 더 끌어 들여 정의단(正義團)으로 개칭하였다. 나중소 는 이 조직에 간부로 참여하였다. 중광단은 1919년 12월 상하이(上海)에 수 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되어 그 소속 군단임을 자부하고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 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서 일이 북로군정서의 총재가 되었고, 사령관 은 김좌진(金佐鎭)이었으며, 나중소는 참모부 장의 직책을 맡았다. 아울러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쌓은 군사 지식을 후배 독립군들에게 전수하기 위해 사 관연성소의 교수부장을 담당하였다.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독립군 양성 대한(북로)군정서는 명칭을 바꾼 초기인 1920년 2월에 독립군 간부 양성기관인 사관 연성소를 설립하였다. 교장은 김좌진이었고, 교관은 이장녕(李章寧) · 강필립 · 이범석(李範 奭) · 오상세(吳祥世) 등이었다. 뛰어난 교관들 이 포진한 사관연성소에서 국내와 만주지역 에서 모집된 약 400명의 독립군 간부 후보들 에게 군대내무서(軍隊內務書)·야외요무령(野 外要務令)·축성교범 등의 교재로 학과 교육을 시키고 총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사용법 등을 가르쳤다. 1920년 9월 9일 298명의 사관연성소 제1 기생이 졸업식을 가졌다. 졸업생들로 본대와 는 별도의 교성대(敎成隊)가 조직되었는데, 교성대의 대장에 선임되었다. 사관연성소 졸업식이 끝나고 채 한 달이 안 된 10월 2일 일제는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약 2만 명의 일본군을 서북간도 독 립군기지를 향해 침입시켰다. 일본군들의 침 략 이유는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서북간도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단의 독립군들이 압록·두 만강을 넘어 군 · 경의 초소를 비롯한 침략기 관을 공격하고, 그들의 수뇌들을 척결하는 군사작전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주둔 하는 일제의 ‘조선군(朝鮮軍)’, 남만주에 주둔 독립군의 청산리대첩 기록화(독립기념관 소장)  나중소의 고려혁명군 확장 관련 활동기사(『시대일보』  1924.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