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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조선의용군의 활동과 만주(중국 동북) 진출 49 최창익은 특히 만주 공작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측근이며 조선의용대 창립 성원이기도 했던 이상조 (李相朝)를 만주에 파견하였다. 이상조는 심양(瀋陽) 을 거쳐 독립운동의 토대가 강했던 북만주로 이동하 였다. 파언현(巴彦縣) 동성툰(東星屯)으로 간 뒤 그곳 에서 1943년 3월 말 독립동맹 제12지부(북만[北滿] 지구특별위원회)를 건립하였다. 이후 이상조는 당시 북만주에거주하던 정성언과 연대하였다. 정성언은 북만주의 중심도시 하얼빈에서 1945년 8월 독립동 맹 북만(北滿)특별위원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독립동맹 북만특위는 가장 많은 사람들을 포섭했 다. 1944년 들어 무정(武亭, 본명 金炳禧)은 특히 조 선 국내의 독립운동가들과의 연계에 노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인망이 높았던 국내의 여운형과 연락이 닿 았고 상호 소통하기까지 했다. 무정과 여운형의 공 작원은 주로 베이징에서 만나 협력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그 도중에 일본이 패망하였다. 한편 독립동맹의 활동 상황이 알려지자 조선 국내 의 문인 김사량(金史良)이나 교수 김태준(金台俊) 등 은 스스로 중국 화북으로 들어와 독립동맹 조직 을 찾아 나섰다. 화북이 최고의 독립운동지역으로 부상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화북의 독립동맹 지 역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조선의용군의 중국 동북 진출과 활동 ➀ 중국 동북 잔류 결정 : 오가황소학교 회의(심양)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옌안 · 태항산 · 산동 (山東) · 기동, 그리고 황하 이남 신사군(新四軍) 지역 의 독립동맹 · 조선의용군은 즉각 대오를 지어서 북 상하기 시작했다. 목표 지점은 만주 최대 도시이 자 조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심양이었다. 1,000여 명의 조선의용군이 심양에 도착한 때는 1945년 11월 초였다. 이 가운데는 중국공산당의 신 사군 지역에서 올라온 신상초(申相楚)도 섞여 있었 다. 신상초는 동경제국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으로 중 국전선으로 끌려나왔다가 탈출, 조선의용군이 된 사 람이었다. 신상초의 회고에 따르면 심양에 도착해서 약 1개 조선의용군 대원들의 마지막 숙영지인 옌안(延安) 나가평(羅家坪) 의 요동(窯洞, 동굴집) 1945년 9월 초 나가평을 출발하기에 앞서 기념촬영한 조선독립 동 맹·조선의용군 대원과 가족들(이상 뉴시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