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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광주 · 전남지방 3 · 1운동의 전개와 특징 49 (5) 행정기관 관리 주도의 경우 조선총독부 하부 행정기관의 관리들이 주도한 지 역은 영암 구림과 담양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 행정 기관의 공직자가 운동에 간접적으로 동조하는 경우 는 많지만, 운동의 지도부에 직접 참가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사례다. 담양사례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 담양에 만세시위 소식은 전달된 것은 서울 3 · 1운 동 직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3월 11일 정기환이 광주만세운동을 목격하고 13일 담양에 돌아오면서 담양 만세시위가 구체적으로 논의 되었다. 담양에 돌아온 정기환은 국한종(지주회 서기), 정경인(군청 고용인), 임민호(면작조합 주사) 등과 3월 28일 담양 읍 장날에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태극기 제작과 격문 작성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보통 학교 학생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이들의 만세시위는 일경에 사전발각되어 산 발적인 만세시위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 각 면 단위를 중심으로 산발적인 시위는 계속되었다. 광주 · 전남지방 3 · 1운동의 특성 광주·전남지방 3·1운동의 특성을 기소자(起訴者) 기준으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교육 별 구성을 살펴보면. 1919년 5월 27일 현재, 총 370 명의 기소자 가운데 보통학교 교육을 받은 자가 전 체 기소자 중 전체 55.1%(총 370명중 204명)로 압 도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한학 수학자가 13.5%(50명), 문맹이 13.7%(51명)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그 외 중고등교육자는 고등교육 2명과 중등교 육 42명으로 총 44명이며, 일본 유학생은 3명을 비 롯해 미상 15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령별 구성을 보면, 18세 이상에서 30세 미만의 청년층이 전체 53.2%(197명)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 으로 31세부터 49세까지는 113명, 18세 미만은 31 명, 50세 이상은 29명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종교별 구성을 보면,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 람이 전체 56.4%(209명), 기독교가 36.7%(136)를, 천도교가 14.9%(18)를, 유교가 3명으로 각각 나타나 고 있다. 이와 같이 광주·전남 3·1운동 역시 각계각층이 참 여한 거족적 민족운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며, 이후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이 지역 민족운 동의 자양분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평가된 다.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목포대학교 연구교수를 지내고 현재 국가기록원 학예연구관(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실장)으로 근무 하 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전남지방 3 · 1운동의 성격」,『국사관논총』 96, 2001 및 「일제하 지주가의 소작관행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 22, 2004 등이 있고, 저 서 로 『한국근현대시기 토지탈환운동 연구』(선인, 2007) 등 다수가 있다. 필자 박이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