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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함안 3 · 1운동의 전개양상과 특징 49 누가, 어디서 주도적으로 참여했는가 함안 3 · 1운동 주요참가자들은 162명으로 파악된 다. 이들 가운데 학력과 직업이 확인되지 않은 인사 60명을 제외한 102명은 한문을 수학한 자가 60명, 한학에 조예가 깊은 자가 14명, 한문교사 6명이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80명으로 전체의 49.4%, 미상자 를 제외하면 78.4%에 달한다. 이 같은 사실은 함안 3 · 1운동의 주도세력이 바로 유림세력이었음을 잘 보 여주고 있다. 결국 함안의 3 · 1운동은 유림이 주도하 고 기독교 세력과 대규모 군민이 가세한 것이다. 함안 3 · 1운동 주요참가자들의 성씨분포는 조씨 43명, 이씨 24명, 김씨 18명, 안씨가 14명, 박씨가 12명 등의 순서이다. 이와 같은 성씨 분포는 16세기 이래 구 한말까지 함안의 대성(大姓) 분포와 거의 일 치한다. 결국 이와 같은 대성들이 함안지역의 향권 을 장악함과 동시에 3 · 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 내지 방조했음을 의미 한다. 주요참가자들의 본적지를 자연부락단위로 파악했 을 때 함안에서 3 · 1운동 주요참가자를 배출한 곳은 함안읍 봉성 20명, 군북 사촌 15명이다. 다음으로 여 항 외암 11명, 함안읍 북촌 10명, 군북 동촌, 대산 하 기 각 6명, 군북 하림, 칠원 구성과 용산, 함안읍 강명 각 5명 순이다. 특히 함안읍 봉성과 군북 사촌면 출 신 등이 많은 것은 이 두 곳에서 대규모 군민이 참가 하고, 가장 치열하게 만세운동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왜 함안의 3 · 1운동은 격렬하게 전개됐을까 1894년 1월에 발생한 함안민란, 1909년 서병희 의병의 투쟁 등으로 대표되는 함안지방 항쟁의 역사 적 전통과 점점 고조되는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의 강경한 진압태도가 상호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서 전개된 3 · 1운동의 격렬함은 20명이 현장에 서 순사하고, 97명에게 실형이 선고 됐다는 사실과 일본 군경의 피해도 전국에서 가장 컸다는 점에서 도 확인할 수 있다. 함안 3 · 1운동의 내용과 방식을 보면 만장(輓章)과 태극기를 앞세운 만세를 고창하는 시위를 기본으로, 전화선 절단, 주재소, 면사무소, 등기소, 우체국, 공 립보통학교 등을 몽둥이나 괭이(땅을 파거나 흙을 고르는 데 쓰는 농기구) 등이나 투석 등으로 공격했 다. 게다가 군수나 면장을 위협하여 만세를 강요하 기도 하고, 일본인을 대상으로 만세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함안의 3 · 1운동은 반 제국주의투쟁인 항일독립운동임과 동시에 반자본 주의적 투쟁의 성격까지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 다. 필자 박철규 부산대학교 사학과 학사 · 석사를 마치고 동아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 았다.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관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해양대학교 국제 해양문제연구소 초빙연구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군북3 · 1독립운동사』(공 저), 선인, 2004 ; 『국내3.1운동Ⅱ』(공저), 독립기념관, 2009 등이 있고, 논문으 로 「함안지역 3 · 1운동의 전개과정과 특징」. 『지역과역사』 16, 부경역사연구소,  2005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