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page


49page

선생은 일찍 고종 7년 서기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고을 동쪽 10리 덕산면 산척리에서 태어나니 경주 이씨 가문 고려 말엽의 대학자 익재 이제현 선생의 23대 손으로 부친은 행우공 모친은 벽진이씨 7세에 동부승지 용우공에게 입양하여 서울로 왔으나 13세에 양부가 별세하고 18세에 생부 또한 여의어 소년의 몸에 무거운 상복을 잇달아 입었건마는 꾸준한 노력과 수양으로 자기 앞 길을 개척해 갔던 것이다. 선생의 학문은 놀랄만한 진경을 보여 25세에 문과에 급제하니 그게 바로 동학혁명이 일어난 갑오년이오. 유교 불교 천주교 등 종교 철학과 천문 고등수학 법학 의학 등에까지 두루 통달하여 학계의 최고봉이 되었으며 고종의 정치고문 헐버트 박사와 친교를 맺아 외국의 신간 서적을 섭렵하여 구미 정치사조에도 밝았던 한편 관계로 나가서는 탁지부 재무관으로부터 성균관 교수 한성사범학교 교관 홍문관 시독 시강원 부담사를 지나 궁내부 특진관 외부 교섭국장 학부 법부 협판을 거쳐 의정부 참찬에 이른 것은 을사년 36세 때이었다. 서기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 매국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선생은 종로에서 연설하고 통곡하고 5적을 베어 국민들에게 사하소서 하고 불튀는 상소문을 위헤 올림과 함께 벼슬을 사직하고 두문불출하다가 이듬해 4월 18일 서울을 벗어나 북간도로 망명하여 거기에 서전의숙을 세우고 동포 자제들을 교육하더니 다시 다음해 서기 1907년 봄 블라드보스토크로 가서 본국으로부터 아우 상익이 인도해 온 이준과 만나 베드로그라드로 전공사 이범진을 찾아가 상의하고 선생은 정사 이준은 부사로 황제의 밀사 자격을 띠고서 통역하는 책임을 진 이범진의 아들 위종과 함께 3인 동행으로 극비밀리에 홀랜드의 수도 헤그에 그것은 6월에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적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조국의 독립을 보장 받으려 함이었으나 마침내 밀사들의 피듣는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또 기자협회 모임에서 연설한 것도 필경 보람없이 된 위에 7월 14일 이준 동지가 통곡하다 못해 피를 토하고 순국하니 세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