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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신백우 선생은 청사에 빛나는 독립투사요 위대한 민족지도자요 민중운동의 선구자이사다. 선생은 1887년 1월삭 1일 여기 청원군 낭성면 묵정에서 부친 병휴선생과 모친 여산 송씨의 장남으로 탄생하시니 문충공 보한재선생의 16대손이시다. 가풍인 충효의 얼을 이어받은 선생은 남달리 총명하여 소년기에 벌써 경사에 달통하셨다. 그러니 일찌기 웅지를 품은 선생은 개화와 신문물에 민하셨으니 약관에 광성측향학교, 한성외국어학교,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차례로 필업하셨다. 당시의 정국은 일제의 압박이 나날이 심해져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되고 국운은 백척간두에 서있었다. 구국일념의 선생은 동지 남형우등과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장래를 맹서하고 다시 신민회에 가입하여 청년학우회를 결성하고 그 서기및 의사원이 되어 기관지 소년의 발행에 참획하셨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국권회복에는 무력양성이 기본이라고 판단하고 그의 적지로 만주를 택하셨다. 이듬해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이동녕, 이시영, 서세충동지들과 협의하여 양병기지를 유하현등 각지에 성신태를 설치하여 국내동지들과의 연락 교민의 정착등 선동투쟁전선을 형성하셨다. 그무렵 선생은 서세충과 함께 왜적의 괴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압록강 철교 시찰차 의주에 오는것을 기회로 철퇴를 가할 준비를 하던중 국내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신민회동지가 거의 피검되니 곧 105인 사건이다. 선생은 이동녕, 서세충동지등과 함께 남북만을 순회하면서 독립군양성에 힘쓰는 한편 단재를 당수로 대동청년당을 재조직하고 그와 함께 조선사연구를 위해 고구려의 유적지를 두루살폈으니 단재의 조선상고사는 이때 골이 잡혔다. 1918년 가족의 환국때문에 일시귀국한 선생은 제1차세계대전후 서울에서 국내독립지사들과 협의하여 선생과 서세충, 신팔균등이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선정되었으나 마침내 3.1운동이 일어나 출발을 중지하고 전국13도 대표로 한성임시정부를 주획하셨다. 그러나 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