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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聖朝(성조)의 초기에 훌륭한 補弼(보필)의 신하들이 숲같이 늘어섰으니 烏川(오천) 李文和先生(이문화선생)은 곧 그 가운데 한 분이었다 그 墓所(묘소)가 廣州(광주)의 稤洞(수동)에 자리잡은지 오백여년이 되었는데 이제 都市(도시)의 人家(인가)가 점차 墓所(묘소)에 핍근해 옴으로 인하여 辛亥年(신해년)(一九七一年:1971년) 여름에 天安(천안) 九星洞(구성동) 乾坐原(건좌원)으로 緬奉(면봉)을 모시게 되었다 이에 여러 宗人(종인)들이 상의하여 神道碑(신도비)를 세우기로 하고 나에게 碑銘(비명)을 請(청)하니 自身(자신)을 돌아보건데 부족한 학식으로서 어찌 감히 이일을 감당하겠는가? 여러 차례 사양하다 마지 못하여 이에 삼가 그 行狀(행장)을 상고하여 아래와 같이 敍述(서술)하는 바이다 공의 자는 伯中(백중)이니 烏川(오천)은 그 호이다 仁川李氏(인천이씨)는 원래 駕洛國(가락국) 首露王(수로왕) 아들로서 그 어머니의 성을 따라 許氏(허씨)가 되었고 그후 新羅(신라)에 이르러 阿湌(아찬)(新羅(신라)의 벼슬이름) 휘 奇(기)가 使命(사명)을 받들고 唐(당)나라에 들어감에 皇帝(황제)께서 그의 어짐을 가상히 여겨 唐(당)나라의 國姓(국성)인 李氏(이씨)로 賜姓(사성)하고 邵城伯(소성백)을 봉했으니 邵城(소성)은 곧 지금의 仁川(인천)이었다. 高麗(고려)에 이르러 휘 許謙(허겸)이 邵城伯(소성백)의 襲封(습봉)을 받아 벼슬이 尙書左僕射(상서좌복사) 上柱國(상주국) 邵城縣開國侯(소성현개국후)에 이르렀고 四代(4대)를 내려와서 公壽(공수)는 벼슬이 門下侍中(문하시중)이요 시호는 文忠公(문충공)이며 그 아들 之氐(지저)는 벼슬이 平章事(평장사)요 시호는 文正公(문정공)이니 이 분들은 공의 八代祖(8대조) 이상이 된다 高祖(고조)의 휘는 迪元(적원)이니 文學(문학)과 德行(덕행)이 있었고 良醞署丞(양온서승)의 벼슬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曾祖(증조)의 휘는 必(필)이니 벼슬이 諸陵署直(제릉서직)이요 祖(조)의 휘는 益歲(익세)이니 벼슬이 中署舍人(중서사인)이며 父(부)의 휘는 深(심)이니 벼슬이 典工判書(전공판서)요 모친은 安東權氏(안동권씨)이다 高麗(고려) 恭愍王(공민왕) 七年(7년)(一三五八年:1358년) 戊戌(무술)에 공이 탄생하니 어렸을 때부터 資稟(자품)이 기이하고 기국이 침중하여 이미 大人(대인)의 기상이 있었다. 글을 배움에 미처 文識(문식)이 넓고 예절로서 몸을 단속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항시 부모의 곁에 시종함에 온화한 모습으로 뜻을 받들었으며 전후의 친상에 六年(6년)을 廬幕(여막)에서 거상하여 슬피 울부짖었다 소년시절에 栗亭(율정) 尹公(윤공)의 門下(문하)에서 수학하였고 鄭圃隱(정포은) 李陶隱(이도은) 金桑村(김상촌) 權陽忖(권양촌) 등 諸賢(제현)과 더불어 추종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