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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25년 9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중국 관내 항일무장조직 조선의용대의 재조명’ 았는데 통칭 30만 명이었다. 도시의 경우 베이징과 텐진 일대에 10여만, 석가장(石家莊) 3만, 신향(新鄕) 8천, 태원(太原) 5천여 명이나 되었다. 중국공산당 세력이 장악한 태항산 근거지에 있는 독립동맹에서는 요원들을 화북의 주요 도시에 파견, 독립동맹의 분맹이나 거점들을 조직하였다. 1944년 9월에는 베이징의 독립동맹 소조를 베이징분맹으로 확대시켰는데, 이듬해 5월에는 맹원이 104명에 이 르렀다. 텐진의 경우 1945년 1월 7일 독립동맹 텐진 분맹이 결성되었는데, 책임자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이름높았던 김명시(金命時)였다. 화북 도시지역의 독립동맹은 특히 일제의 지원병 제(1938년)와 징병제(1944년)에 반발하는 학생들을 포섭하였다. 이들은 현지에서 독립동맹 활동을 하거 나,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延安) 혹은 태항산 소재 독립동맹 교육기관으로 보내져 간부 훈련을 받 았다. 화북의 농촌지구 또한 독립동맹·의용군의 주요 활 동 무대였다. 특히 만주와의 접경지대였던 기동(冀 東)에는 조하·창려·노대(蘆臺)·백각장(柏各庄)·서 하남· 적양해구·칠리해 등 16개의 조선인 농장들이 분포해 있었다. 이 가운데 노대농장과 백각장농장은 일제가 정책적으로 만든 농장으로 경지면적이 방대했고, 조 선 농민 850여 호 4,500명이 거주하였다.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의 협조 하에 1941년부터 이 농장들에 침투하였다. 특히 일본이 패망하면서 북상하는 조선의용군의 일부가 이곳에 들어와 청년들을 포섭하여 의용군 대오를 확대시켜 나갔다. 또한 농장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군량미 로, 일제 경찰이 남긴 총칼은 조선의용군의 무기가 되었다. ➁ 만주 및 국내로의 세력 확대 태항산에서 진행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제2차 대 회(1942.7)에서는 독립동맹·조선의용군의 영향력을 만주 및 국내로 확대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처음에 는 조선의용대의 화북으로의 북상을 앞장서 이끌었 던 최창익이 그 일을 맡았다. 조선의용군 주둔지(하북성 한단시(邯郸市) 섭현(涉县) 하남점진(河 南店 镇) 남장촌 오지산, 독립기념관 제공) 일본군에게 격추 당한 미군기 조종사(앞줄 가운데)를 구출한 뒤 환 영연을 베푼 조선의용군 전사들. 1945년 3월 4일 산서성(山西省) 산수(沁水)현 곽장촌(郭庄村). 김명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