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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25년 3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3 · 1운동의 지역적 전개 양상과 특징 ②’ 등)부터 1920년 4월(해남 우수영 시위)까지 광범위 하게 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영암군 만세시위는 영암보통학교 교사였던 조극환과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 였다. 이들은 3월부터 만세시위의 필요성을 절감하 고 4월 10일 영암 장날을 거사 일로 잡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거사 당일인 4월 10일 새벽. 기숙사에 숨겨 두었던 태극 기가 사전에 발각되자, 학생들은 계획보다 일찍 태 극기를 군중들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 다. 일제 당국의 강제진압으로 30여 명이 체포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한편, 같은 날 영암 구 림에서는 최민섭(군서기), 정학순(면서기), 김재홍(면 서기) 등의 주도로 영암읍 학생들 시위와 연계한 만 세시위가 전개되었으나,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주동 자 10여 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4) 천도교 세력 주도의 경우 천도교 세력에 의해 운동이 주도된 경우는 장흥 이 대표적이다. 장흥 만세시위 준비는 3월 초 교구 장 김재계(金在桂)가 김재반(金在班) 등과 회합하여 3 월 15일 장흥 장날을 이용해 거사할 것을 결의하고 각 지역 책임자를 분담 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각 지 역별 책임 분담은 물론 선언서와 태극기 등사 등 역 할을 분담해 만세시위를 조직적으로 준비하였다. 각 지역 책임자들은 1919년을 전후하여 장흥 천도교 ‘면종리원’에 종사하였던 인물들이었다. 3월 15일 오후, 황생주 등은 선언서를 배포하고, 김재계 · 김재반 등이 만세를 부르는 것을 신호로 만 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이 출동하 자 자진 해산하였지만, 3월 16일 일경의 검거선풍으 로 김재계 등을 포함하여 주동 인물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3월 20일에는 대덕면에서 시위가 있었으며, 4월 1일 용산 · 안양 · 장동 · 장평 · 유치 · 부산 · 관산 7개 면에서 읍내 주동자들과 연락하던 이들에 의해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들은 오후 2시부터 밤까지 산 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해변에서는 횃불을 들 고 각 동리 단위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장흥3 · 1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 장흥교단의 장흥교당 전경. 1906년 신축했 으나, 1918년 개축되었다(전라남도 제공).  1919년 3월 15일 장날 오후에 영암 읍내 장터에서 김재반 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만세 신호를 알리고, 수백명  군중의 만세시위운동을 진두에서 지휘한 김재계(독립기념 관 제공). 그는 이튿날 경찰에 체포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8년 ‘멸왜(滅倭)기도문 사건’으로 다시 고초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