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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24년 6월 Special Theme   제14회 ‘의병의 날’ 기념 특집 ‘대한제국기 후기 의병의 봉기와 일제의 의병 탄압’  년 4월 25일의 거창군 소재 수도산 부근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유종환의 부장 김진규(金辰奎) 이하 9명 이 전사하고, 중상을 입은 유종환 이하 4명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유종환은 도주를 시도하다가 일본군 에 의해 사살되었다. 문태익 또한 전북과 전북‧경남 접경지역에서 의 병활동을 벌였는데 1908년 5월 25일 거창 서북방 백련사 부근에서 100명이 넘는 의병대원 이끌고 일 본군 거창수비대 토벌대와 격전을 벌인 끝에 의병대 원 76명을 잃고 말았다. 13도연합의진에 약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호남 의진의 대표로 참여했던 문태수는 1908년 1월 서울 진공 실패 이후 자신의 고향인 안의로 내려와 의병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의 주 활동무대는 무주 등 전 라북도였지만, 덕유산을 넘어 서부 경남 일대에도 자주 출몰하였다. 문태수 의병대 는 비 교적 규모가 컸고, 그의 휘하에는 소 규모 의병대를 독자적으로 이끄는 부 장들이 많았다. 전성범을 비롯하여 박 춘실, 마중길, 길창서, 전상진, 오병규 등이 그들이었다. 일본군 수비대가 경남지역에서 문 태수와 직접 교전을 벌인 사례는 기록 상 두 차례 나타난다. 하나는 1908년 3월 14일의 안의 서북방 6리(일본거 리 단위) 지점의 신기(新基) 전투이고, 다른 하나는 1909년 5월 8일 덕유산 문성(文城) 동쪽 표고 1237고지에서 전투였다. 특히 문성 전투에서 함양수 비대 토벌대는 문태수와 박춘실이 이 끄는 100여명의 의병세력을 공격하여 13명의 사망 자를 냈으며, 3시간 격전 동안 210발의 탄약을 소비 한 큰 전투를 벌였다. 이밖에 1908년 8월에 체포된 의병 유명국(柳明國) 등의 진술에 따르면 경남 서부지역 일대에서 도원 수 윤영수(尹永壽) 휘하에 박동의(朴東義)를 대장으 로 하는 의병대(부하 50~60명)와 송가(宋哥)·손우식 (孫佑植)을 대장으로 하는 의병대(부하 60~70명) 등 두 개의 의병부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동의 의 병대는 대장 박동의를 필두로 전군장(前軍將) 장궁만 (張弓滿, 이명 張細敬)는 부하 24~25명, 중대장(中大 將) 황내청(黃乃靑)과 도선봉(都先鋒) 이학로(李學魯) 는 각각 부하 30~40명, 좌선봉(左先鋒) 이만영(李萬 永), 중군장(中軍將) 양문칠(梁文七), 영솔장(領率將) 김경삼(金敬三), 후군장(後軍將) 유명국은 각각 부하 경남 산청지역 의병 탄압의 실상을 자세히 기록한 일본군 14연대 『진중일지』 의 1908년 9월 9일자 보고(연합뉴스 제공). 삼도도원수 윤영수, 대장 박동의  등의 경남지역 의병활동을 보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