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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24년 5월 Special Theme    월간 『순국』 400호 기념특집 ‘순국선열유족회 『순국』 발간과 독립운동가들의 기록 편찬’ 인국민회의 지원 등으로 충당하였던 것 같다. 신문 사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지만, 외형적으 로는 정부의 직속기관이 아니라 정부와 무관한 형태 의 회사로 발족하였다. 신문사 운영문제와 프랑스 조계 당국과의 관계가 고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문발행 과정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재정문제 였다. 《독립신문》은 초기부터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휴간과 복간을 반복하였으며 신문발행의 횟 수와 발행면도 상황에 따라 축소할 수 밖에 없었다. 신문 책임자였던 이광수가 안창호에게 여러 차례 신 문사의 어려움을 호소하여 임시정부로부터 임시보 조금을 주선 받기도 하였다. 직원은 숙식이나 해결 할 뿐 봉급은 지급되지 못했다. 신문의 제작과 발송 에 필요한 경비조차 충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장 이광수는 1921년 4월 안창호 의 적극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해로 찾아온 애인 허 영숙과 함께 귀국해 버렸다. 실무를 주관했던 이영 렬 마저 비밀리에 운영되던 삼일인쇄소를 일본공사 관에 밀고 투항하면서 인쇄시설 일체는 프랑스영사 관에 의해 압수되고 말았다. 김승학이 만주(중국 동 북지방)에서 상해에 도착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김승학의 《독립신문》 참여는 1921년 8월 15일 자로 속간된 제110호부터이다. 그는 독립신문사와 는 무관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미 1920년 5월 독립 신문사를 합자회사로 만드는데 참여하였으며, 이때 에도 거금을 출자하였다고 한다. 1920년 상해를 방 문한 때에도 안창호와 여러 차례 만나 회담하는 등, 임시정부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한 신뢰 속에서 안창호는 폐간의 위기에 몰린 《독립신 문》의 속간을 김승학에게 부탁할 수 있었고, 김승학 역시 흔쾌히 신문사를 맡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김 승학이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5만여 원 을 모집하였다는 일제의 기록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의 사정을 그의 「망명객 행적록」은 이렇게 회 고하였다. “ … 며칠 후 도산의 청에 응하여 방문하였더니,  불영사관(佛領事館)에 교섭한 것이 성공되었다  하면서 중국인의 명의로 보증인 겸하여 봉쇄당 한 물품을 반환하여 달라고 신청하면 인쇄소는  해제될 것이라 하면서 불영사관의 지시를 전한 다. 나는 앞서 봉천성강무당(무관학교) 입학 때  중국에 입적한 일이 있으므로, 즉시 내 명의(중 국명 金鐸)로 서류를 신청하여 2주일 만에 삼일 인쇄소 봉쇄가 해제되면서 불영사관 관리 3인 김승학이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편찬한 『한국독립 사』(독립문화사,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