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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애족 애향의 구국 사회 봉사 정신은 국가사회 발전의 초석으로 말은 쉽되 실천은 어렵다. 여기 이 모두를 실행하여 의사 지사의 추앙을 받았으니 공의 성명은 조용필이요. 호는 영은이시다. 공은 1867년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서 출생 평생을 항일투쟁에 헌신하여 1846년 6월 13일 향년 80세로 장서함에 잠시 조국광복의 기쁨만 안은 채 의사의 유언에 따라 무명의 선비들이 묻인 합개산좌에 봉하고 빛나는 업적은 묘비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참배하는 사람이 적어 여기 출생지 입구인 학강정 언덕에 비림공원을 조성. 뜻을 함께 한 분들이 합심하여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용필 지사는 고려개국 벽상공신이요. 대장군 원윤인 함안조씨의 원조 정의 28대손이며 단종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인 어계 조려와 임진왜란 정묘, 병자호란 때 호국충절로 목숨을 바친 조붕 등 함조 13충신의 후손이기도 하다. 공은 7,8세에 경서를 해득 재질이 영특하고 의에 용감 늠늠한 풍채와 힘 또한 장사로 맹호라는 별명을 가졌다.
용필 의사는 구한말의 국운쇠퇴로 국가기강이 문란하여 각지에서 살인강도의 난무로 민생이 위협받자 국가로부터 영남 일대의 질서유지 책임을 위임받아 사회안정을 확립하였고 을사조약 이래 일제의 강압에 항거하여 대한광복단을 조직 구국항일투쟁의 선봉이 되었다. 이어 1915년 대구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로 확대 개편 비밀암살 폭동행령의 4대 강령을 채택 해외 망명 지사와 연속 투쟁 중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년간의 옥고를 치르는 대구 권총 사건을 주도하였고 또한 1917년 10월 10일 당시 부일 반역자인 경북 관찰사 장승원을 암살하고 안동지역에 은신 독립군자금 모금 중 왜헌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2년여의 옥고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동지 규합 국내에 잠입 청송 등지에 은신 항일독립군자금 조달과 후학 교육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용필 의사의 구국 애정이 후일에 밝혀져 1877년 12월 13일 대통령으로부터 조국 독립지사의 훈장이 추서되었으니 공의 평생의 위국충성은 후대의 영원한 귀감이며 민족사의 사표가 아닐 수 없다.
2002년 월 일 문학박사 족손 경래 근식, 족질 양제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