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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1일부터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국권을 되찾고자 3.1운동이 시작되었다. 강원도의 3.1운동은 3월 7일 춘천농업학교에서 시작되었고, 5월 9일 양양의 만세시위가 참잠해질 떄까지 2개우러에 걸쳐 전개되었다. 만세시위 횟수는 원주지역이 총 14회로 가장 많았고, 이어서 이천이 11회, 양양이 9회, 홍천,철원이 7회, 김화,통천이 6회, 횡성,평강이 5회등 모든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대가 5일장을 이용하였으나 점차 평일에도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태극지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선언서 낭독 후 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누비고 군청, 면사무소, 경찰관주재소, 헌병파견소 등에 몰려가 시위하였다. 장터 이외에도 모이기 쉽고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관공서 소재지나 주변에서 시위하였다. 군경의 경계가 삼엄해지자 만세 시위대는 미리 기일과 장소를 약속하여 모이고, 집집마다 찾아가 동원하고 장꾼에 섞여 군중을 선동했다. 만세시위는 처음에는 평화적 시위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무력 또는 횃불시위로 발전하였다. 만세시위중 피검자가 생기면 경찰관서에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다가 일제가 들어주지 않거나 무력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면 이에 대항하여 무력시위로 전환하였다. 점차 시위군중들은 점심을 망태에 넣어 걸머메고, 괭이, 몽둥이, 장작 등을 휴대하여 전투에 대비하고, 훈련된 정규군처럼 지휘자 명령에 따라 행동하였다. 결국 3.1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일제를 축출하고 독립을 쟁취하는데 있었으므로 무력화는 당연한 것이었다. 군중들은 투석으로 면사무소, 군청, 우편소 등을 파괴하고 관료를 구타하는 등 기선을 잡아 사기를 높인 다음 경찰관서나 헌병분견소, 파견소 등을 공격하였다. 강원도에서는 총 95여회의 무력시ㅟ가 행해져, 경찰관서 4곳, 헌병파견소 4곳, 군청과 면사무소 6곳, 우편소 3곳 등 17개소의 관공서를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강원도의 만세시위는 총95건에 이르고, 6만5400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였다. 일제는 강원도 3.1운동과 관련하여 검거된 수가 1,156명이라 하였다. 피검자가 가장 많은 곳은 175명의 화천군과 172명의 양양군이고, 50명 이상인 곳은 원주군, 홍천군, 김화군, 철원군, 영월군,강릉군, 이천군, 횡성군, 춘천군이며, 50명 이내인 곳은 회양군, 울진군,평강군, 간성군, 정선군, 양구군, 인제군이었으며 14명의 평창군이 가장 적었다. 그러나 일제는 국제적 이목을 고려하여 3.1운동의 실태를 고의로 축소하여 그들의 만행을 감추려 하였으므로 피검자 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3.1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거족적 자주독립운동이었다. 따라서 3.1운동은 학구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한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에 천명함으로써 인식을 새롭게 하여 일제의 통치정택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특히 3.1운동은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고, 아시아 약소국가의 민족우동과 저항운동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