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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은 경상남도 마산(馬山) 사람이다. 1928년에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의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에는 월간잡지 『신생(新生)』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6월부터 동아일보에 35회에 걸쳐 빼앗긴 조국의 국토와 문화재에 얽힌 심정을 술회한 「향산유기(香山遊記)」를 연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5월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4년 겨울에 민족독립사업에 유용한 국가적 인재를 양성할 교육기관으로 양사원(養士院)을 설치할 것을 이극노(李克魯)·안호상(安浩相)·이윤재(李允宰) 등과 추진하였다. 1935년에는 조선기념도서출판관(朝鮮紀念圖書出版館)을 조직하는데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1937년에 조선일보에 「한라산 등반기(漢拏山登攀記)」, 1938년에 「지리산 탐험기(智異山探險記)」를 발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1938년에 조선일보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일본군의 명칭을 「아군(我軍)」, 「황군(皇軍)」으로 표기하는 것을 반대하고 동년 6월에 사직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운동(朝鮮語學會運動)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일제강점기간에 한국민족 고유의 시조(時調) 분야에서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여 민족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